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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외이」3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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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도보르작」의 교향곡 제5번은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일명『신세계에서』라고도 한다. 이 교향곡은 소박한 민요주의 선율을 갖고 있다. 누구에게나 쉽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런 악상 때문이리라. 「드보르작」의 고향은「보히미아」(지금의「체코」)의 한 한촌이다. 교향곡 제5번은 그 애절한 향수의 감정이 깃들여있다. 「드보르작」은 1892년에 미국에 이주했다. 『신세계에서』는 그 이듬해인 1893년 12월15일·금요일 하오「뉴요크」의「필하모닉·오키스트러」에 의해 초연 되었다. 구매의「에피소드」가 감명 깊다.
청중들은 대부분이「유럽」에서, 미 대륙으로 건너온 이민들이었다. 그 중에는「아이오와」주의 「스필빌」에 이주해 살던「보히미언」들도 많았다. 연주가 시작되어 2악장의「라르고」에 접어들자 그만 음악회는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만장의 상중들은 저마다 자신의 고심 삼각 했던 이민 생활들을 회상하며 향수를 이기지 못해 손수건을 꺼냈다. 이들은 이민의 2세 혹은 3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와 비슷한 정경을 생각해 본다. 금년1월13일로「하와이」의 한국교포들은 집단 이민 70주년을 맞았다. 오늘, 그들이 우리민요「아리랑」의 「메럴디」를 들으면 똑같이 눈물을 흘리며 향수에 잠길 것이다. 이미 이들의 선조는 고달픈 성상을 잊고 저 세상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노아」의 방주라도 탄 기분으로 미주에 첫발을 들여놓았던 그 뼈아픈 시절의 회충은 그들에게 새로운 감회를 일깨워줄 것이다.
미국상선「켈리」호가 한국민족을 태우고 「하와이」에 도착한 것은 1903년 1월13일이었다고 한다. 당시「하와이」군도는 사랑수수를 재배할 노동력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미 중국인들의 이민이 상당한 규모에 이르렀으나「하와이」원주민들은 이들의 집단화 경향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들에 대한 견제력을 갖기 위해 그후 일본인의 이민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그들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도 있어야 쨌다. 한국인의 이민이 그 뒤를 따른 것이다.
이민생일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새벽 4시 반에 기상, 5시15분에 집합, 6시면 노동이 시작된다. 그 품삯이 하루 70「센트」. 그래도 매월 8 달러씩을 저축했다고 한다. 그들의 생활력은 정말 대단했다. 건초 더미 위에서 막 잠을 자며, 더러는 영양실조로 병고에 신음하면서도 내일을 생각했던 것이다. 모국의 동포들이 일제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은 그 고된 생활에서도 독립자금을 짜내어 성금을 했었다. 그것이 이른바 개회의 빛이 되었으며, 우리의 용기와 의지를 길러 주었다.
자신의 인생행로를 그처럼 극적인 전환 속에 적응하며 개척해간 모습은 감동스럽기도 하다. 어두운 과거는 때때로 새로운 희망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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