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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우방 참전 부대 (14)|콜롬비아·캐나다 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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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남미의 「콜롬비아」와 북미의 「캐나다」는 유엔 참전 16개국 중 가장 늦게 군대를 보내왔지만 약 2년 동안 한국에서 계속 싸웠다.
「캐나다」는 공군과 해군을 50년7월30일부터 육군 1개 대대를 같은 해 12월18일에 각각 파견했으나 지상군 여단 본대는 51년5월4일에 한국에 도착, 6월부터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에 이들의 참전은 좀 늦은 감이 있었다.
그러나 「캐나다」군은 선발대로 온 대대가 「유엔」군의 반격 작전을 도와 큰 성과를 올렸고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 때에도 적의 인해 전술에 대항하여 끝까지 버티는 강한 전투력을 과시했다.
「캐나다」군은 57년6월28일 철수할 때까지 연 병력 2만6천8백여명이 한국에 복무했고 전쟁 중에는 전사 3백12명, 부상 1천5백57명 등 모두 1천8백69명의 인명 피해를 냈다.
한편 중남미에서의 유일한 참전국인 「콜롬비아」군은 『절대로 후퇴하지 않는다』는 그들 특유의 투혼을 발휘하여 유엔 참전국 중 가장 군율이 엄격하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특히 한국과 콜롬비아는 전쟁을 계기로 더욱 두터운 우호 관계가 맺어져 71년10월에는 이들의 참전 기념탑을 한국 정무가 기증, 건립토록 해주었고 또 이를 계기로 『콜롬비아 참전 용사회』가 발족하게 되었다.

<콜롬비아 대대>
「콜롬비아」 공화국은 한국전을 지원한 우방 16개국 중 남「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유일한 국가이며 또 우방국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군대를 보내 왔다.

<후퇴 모르고 군율도 가장 엄해>
이들은 51년6월16일부터 한국전에 참가하여 휴전 다음해인 54년5월21일 한국을 떠났다. 즉 이들은 약 3년 동안 한국에 머무르면서 육군은 대대 병력이 교체로 근무, 연 병력 4천4백여명과 해군 8백명을 포함하여 총 5천2백여명이 참전했다.
「콜롬비아」군은 70년 춘천 지방 산양리 「단장의 능선」의 계곡인 문등리 철의 삼각지 등 주로 중부 전선에서 많은 전투를 겪었다.
「콜롬비아」군은 이중에도 참전 4개월만에 맞이한 금성 전투와 53년3∼4월의 「올드·볼디」 고지전을 대표적인 격전으로 손꼽고 있다.
특히 이들은 한국 참전 일보다는 금성 전투승전일인 51년10월23일을 더 기념하고 있다. 예비역들로 구성된 「재향 군인회」 같은 조직이 없었던 「콜롬비아」에는 물론 한국 참전 용사회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콜롬비아」에서는 매년 이날에 한국 참전 용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전을 회상하고 있어 마치 「재향군인의 날」같은 성격의 모임이 되고 있다.
지난 71년10월23일에는 금성승전 20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수도 「보고타」시 중심부에서 성대한 기념식과 함께 6·25 참전 기념탑 (7층 석탑) 건립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각국의 외교 사절들과 함께 한국 측으로는 당시 「칠레」 주재 겸임 대사였던 강춘희 대사를 비롯, 주미대사관 무관이었던 백석주 육군 소장, 홍기경 해군 대령 (현 해군 준장) 및 「유엔」 한국 참전 협회 지갑종 사무총장 등이 참석했다,
이 기념탑은 한국 정부 지시에 따라 건립된 것으로 정부 예산 6만 달러가 소요되었다.
기념탑은 당초 72년 말까지 완공할 예정으로 있었으나 아직 공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아 73년4월께 준공될 것으로 보인다.
또 이날의 기념탑 건립을 계기로 콜롬비아의 예비역들은 이해 11월 참전 용사회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이 모임은 『국제 참전 용사회』라는 이름으로 회원의 95%가 한국 참전 용사들이다 (이상 지갑종씨의 증언).
「콜롬비아」군이 한국에서 전투를 벌인 2년 동안의 희생자는 모두 7백52명으로 2백명이 전사하고 5백52명이 부상했다.

<한국 정부, 참전 기념탑 세워줘>
평균 신장이 5척5촌 (166·6cm 밖에 안되는 「콜롬비아」군은 한국에 근무하는 동안 여러가지 재미있는 특성을 보였다. 전쟁을 하면서도 시간만 있으면 9인조 관현악대를 만들어 한 「텐트」에서 다른 「텐트」로 옮겨다니면서 「라틴아메리카」 발췌곡을 연주하는가하면 장교가 면도를 하지 않을 때는 5달러의 벌금을 물게하고 또 최소한 한 주일에 한번 이상 고국에 편지를 보내지 않을 때에도 5달러의 벌금을 과했고 도박 금지령을 엄격히 시행하기도 했다.
금성 전투가 시작되었던 51년10월 중순의 유엔군 방어선은 판문점에서 금성 고성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무렵 적은 중부 전선의 금성 지역에 중압을 가하고 있었다. 10월23일 「콜롬비아」군은 금성 남쪽 10마일 지점으로부터 금성을 향해 「유엔」군과 함께 전진하고있었는데 이들은 「유엔」군의 최전방을 담당하여 금성 탈환에 가장 큰공을 세웠다.
『중부 전선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작전은 금성 남방 10마일 지점으로부터의 전진이었다. 10월23일 유엔군은 금성 남쪽 1「마일」지점까지 접근해 있었다.
남 「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한국전에 참가한 「콜롬비아」 군대대는 금성 공격 일선에 나서서 금성에 들어간 최초의 유엔군이 되었다. 10월26일 이 대대의 훌륭한 전과는 미 8군사령관의 격찬을 받았다.』
유엔군 작전 보고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금성 전투를 끝내고 이 대대는 철원 지구로 이동, 52년3월12일부터 「올드·볼디」 고지에서 다시 한차례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올드·볼디」 고지는 철원에서 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임진강의 지류인 역곡천을 중심으로 2∼3백m 정도의 낮은 고지군이 연이어 있는 곳이다.
3월12일 이 대대는 미 제31연대의 전투 정면 지역인 「올드·볼디」 고지로 이동하여 1개 소대 병력으로 이곳의 전초 기지를 점령했다. 이것을 신호로 하여 그후 13일 동안 「콜롬비아」군은 「올드·볼디」쟁탈전을 벌이게 되었다.
3월18일부터 적은 폭격을 증강시켜 그전까지는 10여 발에 불과했던 것이 하루 평균 6백여발씩 쏘아댔다.
23일 저녁 8시쯤 C중대가 지키고 있던 전초 기지를 적은 1개 대대 병력으로 공격해 왔다. 진지 안에까지 올라온 적과 백병전을 벌인 끝에 C중대는 약 60%의 희생을 내고 철수하자 다시 A중대가 투입되어 적을 몰아 낼 수는 있었으나 이 사이 「올드·볼디」와 이 전초 기지에 떨어진 적의 포격으로 많은 희생을 냈다. 밤 10시가 지나 적 대대 병력이 다시 공격해 왔을 때는 「콜롬비아」군은 탄약 보급품마저 거의 떨어져 백병전으로 적과 대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교가 면도 않으면 벌금 물게>
이들은 대대장의 철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는 절대로 후퇴하지 않는 엄격한 군율을 지켰다. 이 전투를 통해 「콜롬비아」군은 적 5백여명을 살상했지만 그들도 전사 33명, 부상 78명, 행방 불명 37명 등 모두 1백57명의 피해를 냈다.

<캐나다 여단>
한국 전쟁이 시작된지 6주일만인 50년8월7일 「캐나다」 정부는 한국에 파병할 「캐나다」 육군 특별 부대의 편성을 성명 했다.
이 특별 부대는 「캐나다」 제25여단이라고 명명되어 「J·M·로킹햄」 준장의 지휘아래 캐나다 보병 연대, 「프린세스·패트리셔」 경보병 연대 및 영국 제 22보병 연대의 각 1개 대대로 편성되었고 그밖에 전차중대 야포연대 공병중대 수송중대 등이 배속되었다.
「캐나다」 25여단은 50년11월 미국 「워싱턴」주 「포트제비스」시에 일단 집결했다가 25일 「프린세스·패트리셔」경보병 연대의 대대를 선발대로 출발시켰다. 「캐나다」군본대는 선발대를 보낸 후 5개월만인 51년5월4일 한국에 도착하여 이동안은 선발대가 단독으로 각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캐나다」군 선발대가 한국을 향해 출발했을 때 유엔군은 청천강 지구로부터 퇴각하고 있었다. 이들이 부산에 도착한 12월18일의 전선은 개성에서 화천에 이르는 38도선까지 밀리고 있어 예비 훈련을 받을 사이도 없이 곧 경상도 지역까지 깊숙이 침투해 온 적「게릴라」 소탕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병력 연 2만6천여명이 참전>
51년2월19일 「캐나다」군은 영 연방 27여단과 함께 여주 북방 7마일 지점으로 이동, 2월21일부터 적과 접전을 벌였다. 이때의 전선은 약간 북상하여 여주 북방 20마일 지점까지 진출해 있었다. 2월23일부터 이 대대는 여주 동북쪽 2개의 고지를 공격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즉 23일부터는 18마일 지점의 419고지를 공격하여. 한주일만에 점령했고 3월7일 이곳에서 다시 5마일 떨어진 532 고지를 공격했을 때는 하룻만에 이를 제압해 버렸다. 이들 2개의 고지 공격은 「캐나마」군이 한국전에서 단독으로 벌인 첫번째의 작전이었다.
약 한달동안 예비대로 머무른 다음 이 대대는 4월7일 38선을 넘어 전진했다. 곧 이어 시작된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이들은 영 연방 여단과 함께 가평 북방 8마일지 점에서 맞이했다. 4월22일 밤 중공군의 일제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전초 진지에 깊숙이 나가 있던 「캐나다」군은 주저항선의 미 제1 및 제9군단과 영 여단이 이미 퇴각한 후였기 때문에 적에 완전 포위되어 다음날 밤까지 계속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진지를 고수했고 우군의 지원 없이 25일 하오에는 단독으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이 전투의 공으로 「캐나다」군은 미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이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67년9월 가평에 건립되어 있다 (본연재 411회에 사진 게재). 이 동안에 「캐나다」 제25여단 본대가 도착하여 51년5월20일부터는 미 제25사단의 지휘를 받아 주로 중부 전선에서 싸웠고 전선이 소강 상태에 들어간 52년5∼6월 사이에는 수백회의 탐색전을 감행한 기록도 세웠다.
◆주요일지 (1952년9월25∼28일)
※25일 ▲제주도 수용소서 공산 포로 소요 9명 부상 ▲남일, 유엔군이 공산 포로 학대했다고 트집
※26일 ▲공중전서 「미그」기 4대 격추 ▲자유당 3차전 당 대회 개최, 총재에 이승만 박사 추대 ▲제주 수용소서 또 소요, 포로 5명 부상
※27일 ▲미군기, 선천의 공산군사령부 폭격 ▲경부선 유천역에 20명의 공비 내습, 방화.
※28일 ▲휴전 회담 10일 휴회 ▲뇌염으로 3백93명 사망 ▲소련, 「시베리아」에 수소탄 공장 완성했다고 국부정보통 언명
◆알림=멀지않아 「지원 작전」이란 제목으로 6·25때의 군수·병참·통신·공병·의무·수송·병기 등 문제를 다룰 계획이오니 관계 자료나 자신을 갖고 있는 분은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연락처=중앙일보 편집국 「민족의 증언」 담당자 앞 전화는 (28)8211 (교환)외 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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