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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브런디지」 은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72년9월11일 하오 7시 반. 「뮌헨」의 「메인·스타디움」에는 『안녕, 「에이버리·브런디지」씨』라는 글자가 전광판에 아로새겨 뉘엿뉘엿 넘어가는 황혼에 반짝이고 있었다.
20년간 국제 「올림픽」 (IOC)을 지배해 온 「브런디지」씨의 극적인 고별 장면이었다.
「브런디지」씨는 확실히 현대 「올림픽」에서 순수 「아마추어리즘」을 부르짖은 「옹고집의 영감」이었다. 너무나도 그 개성이 강했기에 「전세기의 유물」「현대의 화석」 「미스터·올림픽」 「미스터·아마추어」 「현대의 제왕」 등 갖가지 별명이 붙어 다녔다.
그토록 그는 상업주의에 흐르고 국가 대항으로 타락해 가는 「올림픽」을 옛날의 순수 상태로 보존키 위해 몸부림쳤다.
그는 1887년9월28일 「미시건」주의 「디트로이트」시에서 출생, 「일리노이」 대학 시절에는 육상의 원반과 농구 선수 생활을 했고 후에 10종 경기로 전환, 10년간 미국 기록을 갖고 있었다.
IOC에는 1936년에 위원으로 피선됐고 45년 부위원장, 52년에 제5대 위원장으로 선임돼 꼭 20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가 지난 9월 84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시카고」에서 살고 있는 그는 부호로서 동양 고전 미술에도 조예가 깊으며 우리와는 각별한 관계를 맺었었다.
그는 1947년 IOC 가입과 「올림픽」의 참가에 열의를 보인 한국을 아꼈으며 그 인연으로 해서 1955년 고 이기붕씨를 IOC위원직에 피선되도록 노력했고 그 「바통」을 고 이상백 박사, 현재의 장기영씨에게 물려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때 IOC에서 남북한이 호칭 문제와 단일 「팀」 구성을 놓고 실랑이를 벌일때도 그는 언제나 우리편에 서서 옹호해 주기도 했다.
그가 은퇴한 동기는 84세라는 고령도 원인이 됐지만 그의 고전적인 「아마추어리즘」에 정면 도전한 「유럽」의 「스키」 애호국들의 반발,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의 「스테이트·아마」국들이 그의 장기 집권에 염증을 냈기 때문이다.
그는 위원장직을 「에이레」 출신의 「킬러닌」경에게 물려주면서 앞으로의 「올림픽」 운동이 계속 순수하게 이끌어 나가게 될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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