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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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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루더는 대학원에서 장학금을 받는 외에 동부 뉴요크의 조그만 교회에 파트·타임 목사 일을 보았다. 나도 돈벌이에 매달린 때라 가끔 그를 밖에서 만나 보려고 그 교회를 찾아가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세계일주 여비를 대주겠다고 까지 했으나 막상 그것을 거절하자 내 컬럼비아 대학원 학비까지 보태주지 않았다.
1923년 봄 나는 컬럼비아 대학의 인류학 교수 루드·베네딕트로부터 민간 장학금으로는 1등인 3백 달러를 받게 됐다는 통고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내 윌리엄·필딩·오그번 교수가 버나드 대의 경제·사회학회에서 자기의 조수 일을 맡아 달라고 했으며 더우기 오그번 교수는 「미국통계학협회」지의 편집일도 맡아 달라고 했다. 나는 속기는 할 줄 몰라도 상당히 글을 빨리 쓰는 편이었고 잡지 편집을 맡으면서 교정보는 것을 배웠다.
대학원 첫 해에 나는 심리학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인류학 박사학위 공부도 함께 해 나갔다.
나의 석사논문 이탈리아와 미국 어린이들의 지능 테스트는 우리 어머니가 사회학도로서 뉴저지시의 이탈리아인 사회를 연구했던 바로 그 자료를 바탕으로 심리학적 분석을 한 것이다.
루더와 나는 그 당시 아주 이상적인 학생부부였다. 둘이서 절대 피임을 노력하도록 약속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처럼 임신의 두려움이 없이 마음놓고 공부에 열중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루더 자신 남자 위신을 따짐이 없이 자연스럽게 집안 살림 일을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생활비를 서로 공동 부담하고 있었다. 루더는 또 내 친구들을 좋아해서 흉허물없이 아침을 같이 한다든지 특히 그들과 얽히고 설킨 연애 이야기를 같이 털어놓는 정도까지 되었다. 그러면서도 나와 친구들과의 우정관계를 항상 존중해주는 면이었다.
우리 둘이는 서로의 남녀 문제에까지 간섭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 자유로운 관계였다. 결국 우리 둘은 서로 만족하고 있어 믿고 있는 그런 사이인 셈이다.
우리는 목사 가정다운 생활을 해 나갈 셈이었다. 루더는 내가 대학졸업하기 1년 전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사회학과에 들어갔다. 그는 평소부터 사회학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똑같이 대학원을 졸업할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목사직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루더와 나는 한번도 말다툼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서로 오해를 해 본적도 없다. 흔히 기숙사 한방 친구들 사이에 생기는 불켜는 것이나 목욕탕 쓰기와 같은 잔잔한 트러블까지도 우리사이엔 없었다. 정말 단란한 생활의 2년이었다. 내가 원했던 생활-서로의 개성과 자신을 아무거리낌 없이 지켜 갈 수 있는 그런 결혼생활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내가 쓴 시들은 나의 이런 만족스런 생활을 조심스럽게 회의하는 것들이었다. 나 자신 생활에 너무 쉽게 만족하지 않았나 느껴봤던 것이다.
1924년 늦여름 나는 캐나다 터론토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여기에 온 모든 인류학자들이 제각기 한 종족을 선택하여 자기의 전문연구 분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앞으로 쭉 연구 과제로 삼을 「종족」을 선택하고 싶었다.
터론토에서 오자마자 나는 석사를 끝내면 이내 전문 분야로 돌아갈 계획을 잡았다. 루더는 지금 공부를 더 계속하겠다는 계획이며 나에게도 좀 더 공부를 한 다음 실제 연구작업에 들어가라고 권했다. 그는 다음해인 1925∼26년의 유럽여행 연구장학금을 얻었고 또 나는 나대로의 실습 연구비를 받게 돼 있었다. 루더가 목사가 되고 내가 아내가 되어 여섯 명쯤의 자녀를 두고 살리라던 우리의 본래 계획, 즉 교회 목사 일을 하는 데에는 지금의 연구계획이 방향에 어긋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이 같은 새 계획은 우리들 일생을 위해 경험을 넓히는 예비 공부라고 우리는 믿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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