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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현군인가 암군인가” 1세기 뒤 학생들이 내린 평가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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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고 2학년 인문계열 학생이 도서관에서 ‘한국의 지성’ 수업을 하고 있다. 역사 모의법정에서 각각 변호사·검사를 맡아 역사 속 인물의 공과를 함께 평가한다.

지난달 26일 중동고 도서관에선 ‘한국의 지성’ 수업이 한창이었다. 역사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을 선정한 뒤 조별로 검사·변호사를 맡아 갑론을박(甲論乙駁)을 펼치는 모의 역사법정이다. 발표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은 배심원으로 참여한다. 이날의 주제는 조선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1대 황제인 고종. 세상을 떠난 지 94년이 된 왕에 대한 평가를 21세기 고등학교 교실에서 하는 거다.

 “고종은 현군(賢君)입니다. 구한말 러시아와 일본 등 열강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위기를 극복하려 노력한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러일전쟁 때 러시아가 패배해 권력 구도가 깨지지 않았으면 등거리외교는 조선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업적이 됐을 겁니다.”

 고종 변호인단인 여민수(2학년)군 발언이 끝나기 무섭게 검찰 측 박준석(2학년)군이 “이의 있다”며 반발에 나섰다. “결과가 중요합니다. 그는 결국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지 않았습니까. 왕은 모든 백성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입니다.”

 30여 분의 토론 뒤 배심원단의 평결이 이뤄졌다. 고종을 현군·암군(暗君)으로 판단한 학생은 각각 3명·15명이었다. 검사 측 주장이 더 설득력 있었던 거다. 수업은 이렇게 100% 학생이 주도한다. 최미정 역사교사는 수업을 마무리할 때 역사적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을 때만 지적한다. 배심원도 재판 중 언제든 질문할 수 있다. 수업 시간에도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는데, 이는 학생들이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은 후 질문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한국의 지성’은 올 3월부터 2학년 인문계열 학생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특성화 수업 중 하나다. 한국사를 필수로 반영하는 서울대 입시에 도움을 주는 동시에 올바른 역사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시작했다. 2017학년도 대입 수능부터 한국사가 필수 과목으로 지정된 걸 감안하면 중동고가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최 교사는 “학생 대부분이 인터넷에서 얻은 단편적 지식을 확대 해석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웠다”며 “좋다, 나쁘다 식의 이분법적 논리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돕고 싶었다”고 프로그램 취지를 설명했다.

 지금까지 역사법정에 선 인물은 김부식, 세조, 광해군, 명성황후, 이승만 등이다. 학생들은 이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고 상대방 의견을 수용하는 방법을 배운다.

 2학년 여민수군은 “지금껏 고종은 능력 없는 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업적이 많았다”며 “논문 30여 개를 조사하면서 역사 지식을 쌓은 것은 물론 한 가지 현상을 놓고도 양면을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1, 2, 3학년에 각각 맞는 체계적인 특성화 프로그램이 있다. 1학년 때는 진로 계발을 돕는 후엠아이(Who am I?)와 영어로 토론하고 글로벌 롤모델을 찾는 글로벌 리더십을 1, 2학기에 나눠 배운다. 2학년 때는 역사관을 바로 세우는 한국의 지성(문과), 물리·수학을 융합해 배우는 재미있는 물리의 세계(이과), 3학년 때는 자기소개서 작성에 필요한 항목을 정리하면서 논술과 면접을 동시에 대비하는 세계의 지성(문과)과 수리 논구술에 대비하는 재미있는 숫자의 세계(이과) 등이 있다. 이들 수업은 창의체험 프로그램이라 따로 점수를 내진 않는다. 말 그대로 배우는 즐거움만 주는 수업이다. 진도를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수능 체제에 들어가는 다른 많은 학교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오세목 교감은 “학교는 입시기관이 아니다”며 “좋은 대학에 많은 학생을 합격시키는 것보다 중요한 건 학생들이 꿈과 목표를 찾게 하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아야 할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목표를 찾는 대표적인 수업이 ‘후엠아이’다. 시작한 지 10년이 넘은 독특한 자아 찾기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이 꿈과 목표, 그리고 공부하는 이유를 찾도록 돕는다. 2004년 당시 정창현 교장과 교사 4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Who am I?-나는 내가 만든다』는 책을 교재로 사용한다. 당시 책 집필에 참여했던 교사 대부분은 정년퇴직 등으로 학교를 떠났지만 이 프로그램은 필수 교과목으로 자리 잡았다.

 수업은 크게 자기 정체성 확립, 비전 수립, 자기 관리, 커뮤니케이션 향상 등 네 가지 분야로 나뉜다. 이 수업을 통해 자신의 장점을 찾고, 30년 후 스스로의 모습을 그리며 비전을 찾아 나간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꿈을 찾고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학생이 많다. 학생들이 ‘인생 정리 수업’이라고도 표현하는 건 지금까지 한 번도 고민한 적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서다. 배종우(2학년)군은 “이 수업을 통해 나의 과거·현재·미래를 알 수 있었다”며 “꿈도, 공부할 의욕도 별로 없던 친구가 ‘교사’라는 정확한 목표를 찾은 뒤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는 것도 봤다”고 말했다.

 프로그램 개발과 책 집필에 참여한 안광복 철학 교사는 “목표가 생기면 학생 스스로 노력한다”며 “전에는 ‘공부를 왜 하느냐’는 질문에 자신있게 답하는 학생이 별로 없었지만 이제는 구체적으로 자신의 꿈을 얘기한다”고 설명했다.

과학 실험 수업 모습

 특성화 수업뿐 아니라 교과 수업에 대한 만족도도 높다. 지난해 실시한 서울시교육청 교원능력개발평가에서 재학생 80% 이상이 “학교 수업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여기에는 체계적인 학교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다. 중동고 교사들은 수업시간표 작성이나 가정통신문 발송과 같은 행정 업무는 하지 않고 오로지 수업 준비와 교재 개발, 교수법 연구에만 집중한다. 업무지원팀 6명이 수업 외 행정 업무를 전부 책임진다.

 김병민 교장은 “학생의 본분은 공부, 교사의 본분은 수업 아니냐”며 “잡무를 줄이니 교사 스스로 수업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더라”고 말했다. 모든 교사는 한 학기에 한 번씩 교실에 설치된 동영상 장비를 활용해 수업 장면을 녹화한다. 수업시간에 사용하는 말투와 필기 내용, 학생들의 반응을 살피고, 동료 교사와 수업방식을 놓고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며 수업 질을 향상시킨다. 매년 두 차례 동료 교사와 학부모를 초청하는 공개수업 ‘자율장학’시간도 있다. 김 교장은 “학생뿐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수업 내용을 평가받는 자리가 만들어지자 교사들 간에 ‘최고의 강의를 하겠다’는 경쟁심이 생겨나더라”고 말했다. 조원용(1학년)군은 “중학교 때 몇몇 과목은 선생님이 수업을 성의 없게 해 ‘놀 수 있는’ 수업이 있었는데 중동고는 그런 경우가 없다”며 “잠깐도 졸 수가 없다”고 말했다.

글=전민희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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