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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학계가 밝히는 「임나」의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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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천5백년 전 삼국정립초기에 있었던 임나문제는 오랫동안 한·일 양국의 사학자들 사이에 심각한 논쟁의 실마리였다. 일본학계가 한반도내의 임나지배론을 펴왔음에 반하여 한국학계는 그에 정면으로 맞서왔기 때문이다.
이 「임나문제」는 금년 봄 나량 「다까마스」벽화고분의 발견으로 재연되기 시작, 재일 고고학자 이진희씨의 광개토왕비 조작설이 부채질했고, 또 김정학 교수의 일어판 『한국의 고고학』서두에서 특별히 언급하는 등 계속 이 문제가 환기돼 왔다.
그런데 최근 천관우씨는 「한국사의 조류」(신동아12월호)를 통하여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룸으로써 한국학계의 주장을 집약해 매듭지어놓은 느낌이다.
당초 일본학계가 한반도의 낙동강유역 일대를 평정했었다는 근거는 『일본서기』에 의거한 것이며 서기 360년∼560년에 걸쳐 2백년간 통치했다는 것이었다. 이 학설은 일제시대 역사교과서에서까지 강조, 한국침략을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삼기도 했다.
일본학계의 종래의 통설에 대하여 한국학계의 반론은 ⓛ임나는 오히려 일본(구주) 안에 있던 한국의 지방세력이었거나 ②대마도를 가리키는 것, 혹은 ③한국 안에 있었지만 일본이 임나를 통치한 것은 억설이라는 등 대체로 3가지의 반박이 있었다.
이번 천씨의 주장은 그 세쨋번에 해당한다. 그는 일본 안의 분국설이나 대마도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임나가 가야임에는 틀림없으나 2백년간의 동치가 아니고 일시적으로 가야에 출병한데 불과하리라는 견해로 요약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측의 허구 내지 왜곡성을 지적하여 일본 내 분국설을 주장하기는 이조 말의 문헌인 『동사강목』이나 『해동역사』. 또 나량고송총 공동조사에 참가한 북한의 사학자 김석형도 임나가 구주에 있었다는 견해를 주장하고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인정되지만 별로 설득력 있는 학설로서 받아들여지진 못하고 있다. 「임나」란 나라이론을 한국측 기록에는 그리 나타나지 않는다. 광개토왕비에 「임나가나」란 기록이 나오고 『삼국사기』강수전에 그가 본시 「임나가량」사람이라 했으니 신라 진경대사탑비에서 선조가 임나의 왕족이었다는 등 극소한 편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수백을 헤아려 그들의 커다란 관심사였음을 암시하며 고대문화의 흐름으로 보아 문물 수입의 교두보였다. 그러면 임나는 가야의 여러 부족국가 중 어느 나라에 해당하는 것일까.
이점 학술원회장 이병도 박사는 『한국사』고대편에서 이미 밝힌 바 다시 부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임나는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변진한 20여개국 가운데 미오사마국이며 바로 고령을 중심으로 해있던 대가야임에 틀림없다. 일본에서 임나를 「미마나」로 읽는데 「미오야마」의 오와 마가 바뀌어 「미마야오」로 불렀던 데서 유인될 것이다.
일본의 옛 기록에서는 임나와 가라가 흔히 혼동돼 쓰였다. 육가야 가운데 맹주국은 김해의 본가야(가라)와 고영의 대가야(임나)가 서로 주권을 잡았는데, 그때마다 그 맹주가 되는 부족국가의 이름이 육가야의 대표적 이름으로 연칭되고 다른 소국들을 「커버」했다. 그 중에도 가장 보편적으로 확대된 이름이 가라이다.
그것은 가라가 일본열도에 가장 가까와 이해가 밀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가라」란 이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확대돼 쓰였다. 즉 변진 20여개국을 통틀어 「가라」로 했을 뿐만 아니라 삼한의 「한」을 그 감이 부르고 심지어 외국전부를 통칭한 예(「당」도 「가라」) 마저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가야제국이 백제와 신라로부터 좌우 협공됨에 따라 일본은 문물수입교두보가 무너지게 되므로 가야를 도와 다소의 군사행동을 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직물과 광물 등을 수입하기 위한 무역소 같은 왜관이 가야에 설치돼 있었음을 능히 상정할 수 있지만, 총독부 같은 임나부가 있었다는 일본사료의 확대해석은 납득되지 않는다고 이 박사는 지적한다.
서울대박물관장 김원용 박사는 고고학적인 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왜군이 자주 신라해안을 습격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다. 오히려 구주지방에는 삼국계통의 식민지라할까 한반도로부터 이주한 부족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낙동강 유역을 왕래했음은 많은 출토자료로써 입증되고있다.
왜는 임나에 출병한 4세기에 앞서 2세기께부터 변한에 와서 철을 구해갔으며 바로 모국에 와서 귀중한 물건을 사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무역을 위해 왜관 같은 형태의 교두보를 갖고 있었을 것인데 그것을 꼬투리 잡아 임나정복설로 과대 해석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구주일대에 있던 한계세력이 임나인지는 별개 문제라고 말함으로써 임나가 낙동강 유역의 가야란 점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부산대 김정학 교수도 일본학계의 확대해석이나 서기의 과장을 재고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있어서 임나 관계기사가 역사적 사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웅략기 이후이다. 즉 5세기 후반부터인 것이다. 그것은 일본에서 문자에 의한 기록이 생긴게 5세기 초 백제의 학자 왕인이 건너간 이후임과 부합된다.
어쨌든 웅략7년(서기463) 조에 천황이 전협을 임나국의 사(미꼬도모찌)로 임명하며, 8년 조에는 신라가 임나왕을 통하여 일본부(「야마또」의 「미꼬도모찌」) 행군원사 등에게 원명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임나왕과 동시에 일본부가 있고 행군원수 등의 이름도 나온다는 점이다. 또 서기에는 「미야게」(둔가·관가)라는 표현도 쓰고있는데 「미꼬도모찌」란 왕명을 받든 사절을 가리키며 「미야게」란 임시적 주둔군을 뜻한다.
그런데 「미꼬도모찌」나 「미야게」 등에 관련해서 군사이상의 임나를 통치한 것 같은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음은 극히 주목되며, 따라서 그것은 상주 통치기관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본서기』가 편찬된 것은 8세기인데 그 당시 백제측의 원사료에 의거하면서도 자국의 국가의식을 고양키 위하여 윤색 혹은 과장했던 것이다.
그해서 삼국사기에 없는 얘기가 일본서기에서는 엉뚱하게 부연되고 있다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서강대 이기백 교수도 임나 문제에는 같은 의견을 말하면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한국관계 자료란 전혀 믿을만한 게 못된다고 잘라 말한다.
일본학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학자가 경도대학의 상전정소교수를 비롯하여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종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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