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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 2저’ 장기화 … 디플레 직전 일본 빼닮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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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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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화(japanification)의 위험’.

 지난달 중순 열린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나온 말이다. 저성장·저물가가 장기화할 경우 자칫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이 자리에서 한 금통위원은 우리 경제가 맞닥뜨린 현실을 ‘2고(高) 2저(低)’라는 말로 집약했다. 물가와 성장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수출은 호조를 띠며 경상수지는 대규모 흑자를 내고 있어서다. 공교롭게 장기 디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하락)에 빠지기 전 일본 경제의 모습이 딱 그랬다.

 ‘일본화’의 그림자는 물가와 경상수지 흑자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바꾸고 있다. 오랜 인플레 시대를 거치면서 한은의 제1목표는 물가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물가가 너무 낮아서 문제다. 저혈압처럼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는 위험신호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도 그럴 것이 한은의 중기(2013~2015년) 물가안정목표는 2.5~3.5%다. 하지만 올해 한은이 예상하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2% 선이다. 내년에도 2.5% 수준으로 전망한다.

 이에 대해 한은은 “농산물과 수입 원자재 가격의 안정, 무상보육 등 정책효과가 결합해 생긴 이례적 상황일 뿐 디플레에 빠질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 그러나 내부에선 고심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자칫 일본을 따라갈 위험이 없는지 정밀한 검토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화값 강세에도 계속 늘어나는 경상수지 흑자에 대한 의구심도 조금씩 커지고 있다. 이 역시 일본의 전례가 있다. 일본은 플라자 합의로 엔화가 급격한 강세로 전환한 이후에도 경상수지 흑자는 계속됐다. 소비·투자는 부진하고, 수입은 증가하지 않는데 해외투자는 늘면서 이자·배당 수입이 불어났기 때문이다. 금통위에서 한 위원은 이를 두고 “현재 우리나라와 과거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할 때의 패턴이 유사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일본은) 흑자에 안주하며 구조혁신을 소홀히 해 수출부문의 경쟁력도 퇴색했다”고 경고했다.

 민간 경제연구기관도 디플레 위험을 경고하고 나섰다. 9일 LG경제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일본 디플레 직전과 유사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본격적인 디플레에 빠지기 전 상당기간 성장률과 물가가 떨어졌다. 1991년 거품붕괴 이후 소비와 투자가 줄어들고, 이것이 생산과 고용을 위축시켜 다시 수요가 주는 ‘악순환’이 일어났다. 여기에 90년대 후반 쌓여 있던 금융권 부실이 터지며 결정타를 맞았다. LG경제연구원 강중구 책임연구원은 “위험의 정도는 당시 일본만큼 강하지 않지만 방향성이 같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디플레 우려가 현실화하자 10월 기준금리를 한 차례 낮췄다. 하지만 큰 효과가 없자 최근에는 은행들이 중앙은행에 돈을 맡기면 이자를 주는 대신 수수료를 받는 ‘마이너스 예금금리’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디플레 위험이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를 계기로 급격히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양원근 전 KB금융연구소장은 “미국의 출구전략으로 신흥국에 퍼져 있던 돈이 빠져나가며 자산 가격발 디플레 위험이 고조될 수 있다”며 “일본과 달리 한국은 가계가 대규모 부채를 갖고 있어 디플레의 고통이 더 클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에선 저성장·저물가를 어느 정도 현실로 받아들이고, 이에 맞춰 제도와 인식의 틀을 손봐야 시장의 혼선을 줄일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

조민근·이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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