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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영상'서 사라진 장성택 … 北, 체포 당시 사진도 공개

중앙일보

입력

사진에서 한 인물이 지워진다는 건 완전한 몰락을 의미한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이 실린 이른바 ‘1호 사진’일 때는 더욱 그렇다. 김정은(29)이 고모부 장성택(67)을 지목해 ‘삭제’ 버튼을 눌렀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TV가 지난 7일 오후 방영한 기록영화 ‘위대한 동지’ 중 제1부 ‘선군의 한 길에서’. 한 시간 분량의 동영상에 장성택의 흔적이 없었다.

 지난 10월 7일 첫 방송 후 같은 달 28일까지 아홉 차례나 재방송될 때에는 김정은을 가장 가까이에서 수행하는 인물이었지만 40일 만에 빼버린 것이다. 통일부 정세분석국 영상분석팀이 확인한 것만 17곳에 이른다. 최병섭 정보상황실장은 8일 “편집기의 줌인(확대) 기능으로 옆자리 장성택을 빼버리거나 아예 다른 영상으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지웠다”고 말했다.

 권력 핵심 축에서 밀려난 장성택의 추락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지난달 하순 장성택 부하 2명을 공개 처형한 후속조치이기도 하다. 이제는 ‘실각설’ 수준이나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식으로 신중하게 분석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나온다. “장성택 사태가 예상보다 심상치 않은 것 같다”(통일부 당국자)는 의미다. 한번 삭제당한 인물이 다시 복귀한 경우는 찾기 힘들다. 지난해 7월 전격 숙청된 이영호 총참모장도 이후 북한 관영매체와 선전 화보에서 자취를 감췄다. 후계자 시절 김정은이 주도한 화폐개혁(2009년 11월) 실패를 책임지고 이듬해 봄 공개 처형당한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부총리급)도 마찬가지다.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노동당 비서도 그랬다.

 북한이 장성택을 지운 영상을 공개한 시점도 묘하다. 국정원 보고에 따르면 장성택 휘하인 이용하 노동당 행정부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이 처형된 건 11월 하순이다.

 국정원이 이런 사실을 포착해 국회에 보고(3일)한 지 나흘 만에 북한은 보란듯이 장성택 삭제 영상을 틀었다. 김정은이 “장성택은 끝났다”는 메시지를 한국과 중국 등에 보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장성택이 왜 이런 말로를 걷게 됐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부하들의 반당(反黨) 행위나 비리에 대한 연대책임, 어린 조카 앞에서 불경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비리 차원이 아닌 이념적 충돌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4일 노동신문은 혁명 배신자를 비판하면서 “나는 동상이몽(同床異夢)하는 자들을 제일 증오한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을 실었다. ‘동상이몽’은 김정일이 2003년 12월 박봉주 총리와 충돌한 장성택의 전횡을 질책한 뒤 2년 넘게 혁명화 교육을 보낼 때 썼던 표현이다. 장성택이 또다시 뭔가 다른 꿈을 꿨다는 얘기로 해석할 수 있다.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전수한 가장 은밀한 통치 노하우가 장성택 다루기였을지 모른다는 분석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언젠가는 장성택을 쳐야 한다. 고모(김경희)가 만류해도 칼을 휘둘러야 하는 게 권력”이라고 가르쳤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번 사태가 유훈 이행 차원이란 뜻이다. 김경희가 장성택과 운명을 같이할지는 17일 김정일 2주기 행사로 감지될 수 있다.

 관심은 평양 권력의 고삐를 누가 쥐고 있고 어디로 향할 것이냐다. 일단 김정은의 권력 장악엔 이상징후가 감지되지 않는다. 장성택 숙청 직후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등을 데리고 최북단 백두산 지구(양강도 삼지연군)로 간 것도 자신감의 과시다. 김정은은 미국인 억류자 메릴 뉴먼(85)도 7일 석방했다. 이 또한 비슷한 자신감의 과시일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론 김정은 체제의 안정을 단언하기 쉽지 않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가족이란 울타리 없이 친정체제 유지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장성택을 쳐내며 발표한 13개 경제개발구 추진도 새로운 도전이다. 지난해 4월 김정은은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며 ‘사회주의 부귀영화’까지 약속했지만 실제론 체제 선전성 건설프로젝트뿐이었다.

한편 9일 북한 조선중앙TV는 숙청이 공식 발표된 장성택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체포 장면이 담긴 사진을 전격 공개했다고 통일부가 밝혔다.공개된 사진에 따르면 장성택은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 도중 맨 앞자리에 앉아있다가 북한 보위부 요원들로 추정되는 군복 차림의 두명의 요원에게 끌려나가는 모습이 담겨있다.

조선중앙TV는 장성택의 체포 시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공개된 사진 화질이 선명하지 않아 체포되는 장성택의 표정도 나타나는 않았다.북한이 숙청된 고위급 인사의 체포 사진을 공개하는 것은 지난 1970년대 이후 처음일 만큼 이례적인 일이다. 장성택의 체포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장성택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영종 기자

1호 사진=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영상을 지칭하는 말. 김정은 등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기 어려운 데서 나온 표현이다. 1호 행사, 1호 작품 등의 말도 쓰인다.

[첫번째 사진 설명=북한은 기록영화 ‘위대한 동지’에서 장성택을 세 가지 방법으로 삭제했다. 장성택이 보이지 않게 장면을 교체하거나, 같은 장면을 확대해 화면 바깥으로 장성택을 사라지게 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동영상에서 장성택을 모든 컷에서 일일이 삭제하는 것이다.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는 이 방법은 위 사진과 같이 장성택이 사람들 중간에 등장해 앞의 두 가지 방법으로도 삭제할 수 없을 때 사용됐다. 아래 사진은 화면을 확대해 장성택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썼다. 김정은의 군 관련 활동을 담아 조선중앙TV가 방영한 이 장면들의 정확한 촬영 시점과 장소는 파악되지 않았다. [사진 통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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