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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제28화 북간도(3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사라진 큰 별들>
흰 수건이 검은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윤동주의 『슬픈 권속』이란 시다. 북간도 동포들의 비애를 표현한 것이다.
윤동주는 명동에서 출생, 명동과 은진중학을 나온 뒤 연전을 거쳐서 일본입교대학에 유학했다. 그러다가 곧 동지사대학에 옮겼는데 이 학교에서 한글운동 등 항일행위로 43년에 검거되었다. 그는 2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해방되던 45년2월16일에 일제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그때 29살.
윤동주의 아버지는 윤영석. 우리 나라(동)의 기둥(주)이 되라 해서 동주로 지어준 것이었다.
은진중학을 마치고 서울 연희전문으로 올 때 윤영석은 문과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생각은 기술계통을 원했는데 그 까닭은 윤동주가 북간도에 있을 때도 한글로 시를 발표하여 가끔 말썽이 나 부모들에게 걱정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동주는 체포될 때 경도대학 다니던 고종사촌 송몽규와 같이 붙잡힌 것이다.
이 둘은 대학에서 일기도 한글로 쓰는가 하면 편지는 물론 시 등 작품을 한글로 발표하고 반전사상을 거침없이 말해 일제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었다. 그는 변소에 한글로 시구를 낙서하는 등 일제의 신경을 자극해왔다는 것이다.
일제는 복역 중 종전이 가까워 오자 독물주사를 놓아 죽였는데 동주가 먼저 죽고 몽규는 1주일 후에 죽었다.
이들이 죽었을 때 윤영춘이 구주에 가서 시체를 화장, 뼈를 갖고 돌아와 용정에 묻었다.
시체를 화장할 때 같은 감방에 있던 한 일본인이 윤영춘을 위로해주면서 윤동주의 비밀원고가 높이 한자 가량이나 있었는데 고등계 형사들이 압수해갔다고 말해주었다는 것이다(연세대학 동문들은 그의 순국을 추도하여 교정에 추모시비를 세웠다).
이러는 동안 일본의 침략과 싸우며 북간도를 개척했던 큰 별들이 하나씩 사라져 갔다. 42년에 김약연이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것이다. 그는 사망하기 전인 28년에 처음으로 평양에 와서 평양신학교에서 1년 동안 청강생으로 공부하고 졸업장을 받아 목사가 되었었다. 목사는 4년 공부를 해야하는 것이지만 그의 일생의 공적을 감안해서 이렇게 파격적인 대우를 한 것이었고 그는 여기서 조만식·길선주 윤치호 등과 친히 사귀었다. 그의 장례식은 기독교식으로 엄수되었다.
이 때를 전후해서 이범윤도 사망했고 북간도의 호랑이라던 홍범도는 흑하사변의 한을 끝내 풀지 못하고 노령「일크츠크」의 한촌에서 73세를 일기로 쓸쓸하게 순국한 것이다.
이동휘는 이보다 앞선 1935년에 63세로 역시 「일크츠크」근처에서 의롭게 죽었다.
또 많은 독립군을 길러내고 일제와 싸웠던 오동진은 이들보다 앞서 1929년에 체포되어 17년 동안의 긴 옥고 끝에 1944년 해방을 눈앞에 두고 신의주감옥에서 순국했다. 대한통군부를 꾸며 만주벌판을 누비던 김동삼도 광복을 못보고 순국했다.
그는 192l년에 「하르빈」에서 밀정에게 붙잡혀 평양법원에서 15년형을 받고 복역하다 60세가 되는 37년에 옥사한 것이다.
이 땐 시체를 인수할 사람이 없어서 며칠 그대로 있다가 시인이자 스님인 만해 한용운이 시체를 거두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큰 별들이 떨어져갔다. 그러나 이 별들이 기른 새싹들이 자라나는 가운데 해방을 맞게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신한촌 이야기에서 유명한 사람 하나를 빠뜨렸다. 윤능효란 사람이다. 신한촌의 초기 이주자 가운데 한 사람인데 원동대학에서 공부했고 신한촌에서 책방을 경영한 사람이다. 윤은 그곳에서 돈을 웬만큼 번 사람으로 이동휘·이동녕·박은식·안중근 등 의사들이 신한촌에 오면 거의 이 집에서 머물렀고 지사의 뒷바라지를 했다.
특히 순국독립운동자의 가족 보살피기에 적극 나서서 처음엔 이준 가족 구휼사업, 안중근 의사의 거사자금, 거사 후는 「러시아」 및 영국인 변호사파견 및 가족 돕기 모금간부, 전명운 의사 가족돕기 등 숨은 일을 많이 했던 인물이었다. 51년에 89세로 사망했다.
또 하나는 1921년째의 일이다. 와룡동에 사는 정기선이 국자가에서 일본관헌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뒤 그는 탈옥했으나 쫓기다 총을 맞아 쓰러졌다. 일본군은 부상한 그를 이웃에 있던 한국인의 초가집에 던져 넣고는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이 사람은 15만원 탈취의거에 참가하려하다가 한상호와 바꿔 양보한 사람이었다. 이 정 의사는 그때 24살이었고 딸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 돈암동 성암교회의 정순원 전도사이다..
박계주는 이같이 북간도에서 벌어진 온갖 사건을 묶어 『대지의 성좌』를 엮으려 했으나 미완으로 남겼던 것이다.
그러나 북간도에는 이렇듯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보다 이름없이 쓰러진 수많은 무명애국자의 혼이 잠들고 있는 것이다.
정처없이 다니는 나라 잃은 우리가
만리이역에서 슬픈 말과 눈물로
순국제현을 생각하는 서러움에 하늘 땅이 캄캄하고 가슴이 터진다.
1920년께 동포가 사는 북간도의 골짜기 뫼봉우리에는 이 독립군 장송가가 거의 날마다 퍼졌다. 그리고 이제는 역사로 기록되었으나 역사의 기록에서 빠진 일들이 너무 많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그치지 않는 것이다. <끝> [제자 이지택]
※다음은 정인승씨의 이야기로 조선어학회 사건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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