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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9)제자 이지택|<제28화>북간도(29)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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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망명지 신한촌>
일본 영사관 화재, 15만원 탈취사건 등 큰 사건이 잇달게 되자 일본관헌들은 젊은 학생들을 일제 검속하기 시작했는데 그 체포명단에 나도 끼게 되었다.
그래서 1920년4월에 할 수 없이 나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을 가게 됐다. 체포령이 내린 뒤 나는 집에서 자지도 못 하고 이집 저집 피해 다니다가 어느 날 용정 영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지도를 받은 정재면 선생께 들렀다.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니 정 선생은 『고생 많겠다』며 쪽지를 한강 써주었다.
이것을 갖고 토성포에 있는 김계안 장로에게 가라는 것이었다. 적지 않게 의심을 품으면서 김 장로의 집을 찾아가니 오막살이었다.
김 장로에게 큰절을 하고 『붙잡히게 되어 「시베리아」로 갑니다』면서 정 선생의 쪽지를 드렸더니 그는 함께 기도 드리자며 간단한 기도를 드리고는 방구석에 놓여있는 석유궤짝으로 만든 서류상자 같은 통을 뒤지고 주머니 1개를 뒤지더니 그 속에서 돈20원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급할 때에 쓰라」는 것이었다. 고맙게 받았는데 왜 김 장로가 돈을 주는지 그 때로서는 몰랐다.
해방되어 용정에서 정재면을 만났더니 김계안 목사가 당시 국민회의 용정지구 재정책임자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독립운동자의 뒷바라지를 해 주는 큰 임무를 맡으면서도 신분을 철저히 위장해서 끝내 일본관헌이 눈치채지 못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김 장로는 일부러 기항을 일삼았던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광신자로 소문나 있었다. 여담 한 토막-.예배당 이름은 「새마을」이었다. 넓은 운동장이 있었다. 김 장로는 철저해서 일요일은. 예배 이외는 아무 것도 못하게 막았다.
운동장에 모인 우리들은 항상 김 장로가 나타나는 것을 감시하는 보초(?)를 세워놓고 당시 유행했던 「매지깨」라는 노름을 벌이곤 했다. 투전의 일종이었다. 보초를 세워 놓았다가도 여러번 들켜 경을 쳤다. 우리들은 김계안(발음이 같으니)이 아닌 김오안이라고 별호를 붙여 드렸던 것이다.
이분은 설교를 하면 30뿐쯤은 보통이었다. 너무 지루해서 장난을 치려고 하지만 모든 신도에게 눈을 감으라고 해놓고는 자신은 눈을 크게 뜨고 설교하는 바람에 꼼짝 못 했었다.
이 때는 설교를 하면 「강도」라고 했는데 발음이 「경도」와 같아서 선구로 고쳤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 분이 준 20원을 노자로 하여 1주일만에 「블라디보스트크」의 신한촌에 도착했다.
흔히 해삼위라고 하는 이 거리엔 우리 동포들이 일찍부터 이주, 정착했는데 「러시아」 정부에서 한국인등 외국인의 주거지를 제한해서 결국 우리 동포들끼리 모여 살게 되어 이곳을 신한촌이라 했던 것이다.
이 신한촌은 「아무르」만을 끼고 있는데 「블라디보스트크」의 거리 전체에서 보면 북서쪽 언덕배기 몹쓸 고장이었다.
중국세력, 일본세력이 물론 미치지 못하는 곳인 반면 여기서 북간도에 드나들기는 쉬워서 독립운동자들의 은신처, 또는 운동의 기지로서는 더 좋은 곳이 없었다.
또 우리 동포들끼리 모여 사는 곳이니 말이 불편하지 않고 갖가지 방법으로 위장하고 들어오는 밀정, 친일 압잡이 등을 색출해 내는데도 여러 가지 잇점이 있었다. 따라서 북만주, 상해 등지의 독립운동자 치고 여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여기서 무기를 구했고 부상자를 치료했고 또 독립신문인 신한공보 등을 발해했다. 여기는 유럽으로 왕래하는 독립운동자들에게는 바깥세계로 통하는 창구이기도 했다.
이동휘 안중근 안창호 장지연 신채호 박은직 남궁억 여운형 나철 이상설 이범윤 홍범도 김약연 김좌진 오동진 서일 김동삼 유여대 편강렬 등등 독립지사 치고 여기를 안 거친 사람이 없는 독립군의 안식처였다.
내가 갔을 때 신한촌에는 장건상이 와 있었다. 이 때 장건상은 장도산이란 이름도 갖고 있었는데 이는 모두 변명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진짜 이름은 장명상이다.
어느날 신한촌 청년들이 그곳 중국인 학생들과 축구를 했다. 나도 출전했는데 우리편에 장건상이 끼여 인사를 나눈 것이다. 나보다 위였다.
이 신한촌의 한국인들은 북간도에서의 중국세력이 쇠퇴하는 것에 반해 일본세력이 강성해 가는 것을 안타까와했으며 특히 교묘하게 침투하는 일본 밀정과 압잡이의 색출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연락이 되어 있어서 괜찮았지만 낯선 사람은 여기 들어올 때 심사를 받는 것이었다.
심사는 까다로왔다. 우선 「새얼굴」이 들어오면 독립군의 청년들이 그를 불러다 세워놓고 심문하는 것이 관례였다. 처음 살피는 것이 손과 발이다. 먼길을 걸어오느라고 발이 부르트거나 북간도에서 험한 일을 해서 손에 못이 박힌 자는 1차 예비검사에서 합격이 되는 셈이지만 일한 손이 아니거나 깨끗한 발은 의심의 대상이었다. 또 배를 타고 왔거나 말을 타고 온 흔적이 있는 자도 밀정으로 단정하여 다그쳤다. 밀정의 혐의가 있는 자는 신한촌의 절벽에서 발길로 차 낭떠러지에 굴려 처형하는 것이었다. 밑은 험한 「아무르」만이다. 절벽은 1백m를 훨씬 넘었다.
이러한 검색방법으로 많은 일정을 사전에 걸러냈지만 그 중엔 진정한 독립운동자도 한둘 끼여 아깝게 살해된 경우가 있었다. 이 신한촌이 마련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계속> 【이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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