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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피어린 산과 언덕 (10)|베티 고지 전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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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3면

공산군은 1953년7월 중순 휴전 협정 조인을 눈앞에 두고 요충 지점들을 확보키 위해 1백55「마일」전 전선에 걸쳐 아군 전초 진지들에 대하여 최후의 전략 전술적 대공세를 가해 왔다.
이 같은 적의 대공격은 특히 화천 북방과 금성 지역의 949고지, 적근산, 지형 능선 등과 서부 전선의 「베티」 고지 등에 집중됐다.
중공군은 한국군 담당 지역에 주공을 돌렸는데 이것은 당시 휴전을 단호히 거부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단독 북진론」과 국민 여론을 꺾으려는 공산측의 정략적 의도도 다분히 작용한 것이라고 들 수 있겠다.
전략 지점 확보와 휴전 성취라는 일석이조의 목적을 노린 공산군의 소위 「7·13 대공세」는 또 한번 한국 산하를 피로 물들게 했다.
한국군은 이 공세로 그 동안 확보했던 일부 요지들을 잃고 말았는데 그만큼 적의 최후 공세는 치열을 극한 것이었다.

<7·13 공세로 중공군과 대결전>
증강된 각종 화기를 앞세우고 한 지역을 향해 수개 사단이 개미떼처럼 달려 붙은 중공군의 인해 공격에는 한국군의 사력을 다한 방어도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7·13 공세는 중공과 한국군과의 일대 결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렵의 전투는 전쟁 3년 동안에 전력을 거의 상실해 버린 북한 공산군은 동부 전선에서 현상을 유지하는데 급급했고 중공군이 주력이었다.
7월15일 서부 전선 국군 제1사단 지역의 전초 「베티」 고지에서는 김만술 상사가 지휘한 아군 1개 소대가 하루에 무려 19번의 중공군 중대 내지 대대 병력의 내습을 격퇴시키고 혈투의 전공을 세웠다.
김 상사는 이런 공으로 l계급 특진돼 소위로 임관되고 미국의 최고 훈장인 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러면 「베티」 고지 전투 이야기를 당시 1사단의 지휘관들과 김만술씨로부터 들어보겠다.
▲김동빈씨 (당시 한국군 제l사단장·회장=예비역 육군 중장·현 사업·49) <53년6월 하순 「퀸」고지 전투 이후 이 지역과 「노리」 고지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더니 중공군은 7월 대공세의 방향을 임진강 서쪽의 「베티」 고지로 돌리더군요.
중공군은 이때 임진강 건너의 「베티」를 비롯한 몇개의 아군 전초 진지를 점령해 우리를 강 이남으로 물러가게 하려는 심산이었습니다.
「베티」 고지에서 김만술 상사가 아군의 무차별 진지내 포격까지 견디면서 영웅적으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고지의 「벙커」들이 워낙 튼튼했기 때문이예요.
중공군은 7월13일 밤 자정이 가까와 비가 내리는 불순한 기상 상태를 이용, 1개 소대 병력으로 「베티」 고지를 기습해 왔어요.
이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11연대 7중대는 이틀 동안 방어전을 계속하다가 전투력이 약화돼 15일에는 제2대대 6중대 2소대로 교체, 투입시켰습니다.
이 고지에는 원래 아군 1개 소대 병력이 포진해 있었는데 적의 공격이 시작된 후부터는 인명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소규모의 병력만을 배치시켜 놨어요. 전투는 김만술 상사가 싸운 15일의 혼전 후에도 그에 못지 않게 격렬하게 계속됐습니다.>

<사단의 명예 걸고 방어를 다짐>
▲장춘권씨 (당시 1사단 참모장=대령·예비역 육군 소장·현 사업·48) <「퀸」·「노리」 고지가 적 수중으로 들어가자 「베티」 고지는 임진강 이북의 유일한 아군 전초가 됐습니다. 우리 1사단은 사단의 명예를 걸고 이 고지만은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휴전까지 지킬 각오였어요.
중공군은 7월 중순 오른쪽으로 임진강을 끼고 있는 「베티」 고지를 3면에서 집중 공격해옵디다. 만두 모양으로 생긴 이 고지는 면적이 2천여평 밖에 안됐는데 위에다는 동굴을 아주 견고하게 깊이 파놨었지요.
적이 하도 악착같이 달라붙길래 15일에는 고지를 방어 중인 우리 병력이 전멸할 것을 각오하고 강력한 진지내 집중 포격을 퍼부었습니다.
한 평에 10발 정도의 포탄을 때려 대는 대포격이었으니까 사실 이때의 전투에서 백병전은 거의 블가능했어요.
이처럼 무서운 포격을 김만술 상사가 지휘한 우리 1개 소대는 기적적으로 견뎌내면서 끝까지 적을 방어해 냈습니다.>
▲김만술씨 (당시 1사단 11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상사=예비역 육군 대위·현 동양 공과 기술 학교 경영·45) <우리 11연대는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강 건너의 「베티」 고지를 전초로 해서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53년7월15일 내가 지휘하는 2소대는 7중대가 방어전을 펴고 있던 고지로 나가 그곳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이날 하오 l시쫌 진지 교대를 마쳤습니다.
35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가 고지에 올라보니 7중대 l소대는 겨우 소대장 이하 7명만이 남아 있더군요.
나는 우리가 오기 전 이틀동안의 「베티」 고지 공방전이 얼마나 격렬했던가를 직감적으로 느꼈어요.
이 고지는 2백m 정도의 낮은 봉우리가 3개 연해 있었는데 이때는 이미 왼쪽 봉우리가 적 수중에 들어가 있습디다.
하오 4시쯤 되니까 김봉건 대대장으로부터 이 봉우리를 탈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데요. 이때부터 피비린내 나는 「베티」 고지의 혈전이 시작된 겁니다.
처음엔 1개 분대 병력으로 공격해 올라갔어요. 팔부 능선에 올라붙고 나니까 뒤에서 중공군 총알이 날아오는 거예요.

<소대원 겨우 11명만 살아 남아>
소속을 일일이 수색하지 않고 급히 올라갔던게 큰 실수였어요. 그러니까 앞뒤에서 적의 반격을 당하게 된 셈이었지요.
이렇게 되고 보니 전 소대 병력이 뛰어나가 육박전을 벌이는 수밖에 없더군요.
소대 전우들이 합세하는 바람에 중공군을 일단 격퇴시킬 수는 있었으나 이 같은 육탄전은 16일까지 19차례나 반복됐어요.
우리는 고지 중앙봉에 주력을 배치했었는데 적은 좌우의 봉우리를 향해 1∼2개 중대 병력으로 계속 집중 공격을 가해옵디다. 아군의 정확한 지원 포격이 아니면 우리 병력으론 도저히 망해낼 수가 없었어요.
고지로 기어올라오던 적병들은 아군 포탄에 대부분이 죽었고 진지까지 들어온 적은 우리 대원들이 대검과 수류탄으로 소탕해 버렸습니다.
고지가 혼전 상태로 들어가니까 아군은 무차별 포격을 가해 대더군요. 밤 9시쯤 나는 고지 주위가 소총과 수류탄의 폭음으로 진동하는 가운데 호속에서 중대장에게 전황을 보고 하다가 옆에 적 수류탄이 날아와 떨어지는 통에 무전기가 일부 파손돼 버리고 죽을 뻔했어요.
할 수 없어 발끝에 경상을 입은 부상병 한명을 중대 본부로 내려보냈지요. 부상병을 연락 차 보냈으나 밤 12시가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는데는 가슴이 타더군요.
모든 걸 거의 포기해 버린 채 주저앉아 있는데 통신병 이광로 하사가 어디서 전화기를 주워 들고 옵디다.
이렇게 해서 전투 중에 끊긴 전화선을 극적으로 연결시켰지요.
중대 본부서는 그 동안 통신이 끊기자 우리 소대가 전멸한 것으로 간주하고 반격 작전을 논의하고 있었다더군요.
적이 포격을 뚫고 우리 진지 앞까지 올라오면 우리 전우들이 동굴 속에서 뛰어나가 사살해 버렸는데 밤새 이렇게 해서 고지를 사수한 거예요.
무차별 진지내 포격이 계속돼 고지 위서 제대로 백병전을 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 동굴에 접근한 적은 모조리 때려 넘겼습니다.
날이 밝으니까 악착같이 올라붙던 중공군의 공격이 좀 뜸해집디다.
정신을 차리고 소대 인원을 파악해 보니 35평 중 11명만이 남아 있더군요. 아침 8시쯤 연대장 최주종 대령과 전화 연락이 닿았는데 연대장은 지원 병력을 보내 주겠다고 하더군요.

<전공으로 미국 십자 훈장 받아>
나는 우리 전우 11명이 고지를 끝까지 지킬테니 수류탄과 실탄이나 충분히 보급해 달라고 했어요.
이때 「베티」 고지는 전면 적의 317고지로부터 감제를 당하고 있고 그 동안의 격전으로 호가 모두 파괴돼 병력을 증강해 봤자 아군의 대대적인 주간 작전은 불가능했어요.
11시쯤 되니까 내가 요구한 탄약 대신 김기진 소위가 지휘하는 소대 병력이 우리와 진지교대를 하러 올라오데요.
우리는 이 전투에서 중공군 3백50여명을 사살했고 포로 1명을 잡았습니다. 내려와 들으니 우리 11연대 좌측에 있던 영 연방 1사단 포대에서도 지원 포격을 해줬다더군요.
「베티」 고지에서는 이후에도 내가 겪은 것과 같은 혼전이 여러 번 있었는데 정부서는 특별히 나한테만 포상을 해준 것 같아요.
나는 「베티」 고지 전공으로 다음해 2월2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렬한 환영식과 더불어 미 십자 훈장을 받았습니다.
◆주요일지 (1952년7월5∼8일)
※5일▲원산만을 7시간 맹포 격전 ▲이 대통령, 발췌 개헌안 통과에 담화 발표 ▲중공, 수풍 폭격을 심각히 검토 중이라고 국부 소식통 언명
※6일 ▲남원∼이리간 철도 운행 중지
※7일 ▲공산군, 14대의 「탱크」 엄호 하에 김성동 남방의 아군 공격 ▲거제도 수용소서 28명의 포로 도망, 그 중 18명은 체포 ▲미 공화당 전당 대회 개막
※8일 ▲아군, 김성동 남방의 적 공격 격퇴 ▲월남전격화
※알림=「민족의 증언」 출판에 관한 문의는 을유문화사로 (73)8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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