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규의 시장 헤집기] 원유 종말론의 종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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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호 29면

40년 전인 1973년 10월 국제 석유시장에 폭탄선언이 나왔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라크 등 석유수출국기구(OPEC) 주요 회원국들이 석유를 무기화했다. 그들은 “원유값을 17% 올리겠다”며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에서 철수할 때까지 원유 생산량을 매달 5%씩 감산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음울한(dismal) 전망 하나가 기승부리기 시작했다. “30년 정도 지나면 유전이 고갈된다”는 예측이었다. 이른바 ‘원유 종말론’이다.

종말론은 산유국의 석유 무기화와 맞물려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원유값이 단숨에 배럴당 3달러에서 12달러 선까지 4배나 뛰었다. 이후 종말론은 에너지 시장의 원초적 두려움으로 자리 잡았다. 에너지 투자 불패론으로 진화하기도 했다. “원유 등 에너지 자원이 곧 고갈되니 값은 오를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뿌리내린 것이다.

6년 뒤인 1979년엔 제2차 석유파동이 엄습했다. 이번엔 이란 혁명이 방아쇠였다. 다시 종말론이 활활 타오르며 원유값이 치솟았다. 세계 경제는 기묘한 침체에 빠졌다. 80년 회복세를 보이다가 침체의 수렁에 떨어졌다. 오죽했으면 더블딥(이중 침체)이란 말이 만들어졌을까.

그러나 종말론과 불패론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OPEC 회원국들이 가격전쟁(Price War)을 벌이면서부터다. 세계는 더블딥 때문에 원유 소비가 줄었다. 반면 원유 생산은 계속 늘어났다. 일사불란했던 OPEC 회원국들은 국제유가 하락분을 증산(增産)으로 벌충하려고 했다. 그 결과는 국제유가의 20년에 걸친 장기 침체였다. 원유값은 배럴당 12달러 선까지 추락했다. 일시적인 일이 아니었다. 90년대 내내 저유가 시대가 이어졌다. 석유 관련 투자자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종말론은 중국의 산업화와 함께 다시 고개를 들었다. “13억 명의 인구대국이 몰려 사는 중국이 석유 에너지를 쓰기 시작하면 매장량이 유한한 원유는 금세 바닥난다”는 식이었다. 원유값이 다시 치솟았다. 요즘도 원유값이 배럴당 100달러 선을 웃돌고 있는 가장 큰 이유다.

그런데 최근 종말론자에겐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OPEC 회원국 사이의 가격전쟁이다. 이달 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OPEC 회의에서 이란과 이라크 대표가 이런 선언을 했다. “내년 원유 생산량을 크게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란은 하루 생산량을 현재 280만 배럴에서 400만 배럴로, 이라크는 100만 배럴에서 400만 배럴로 늘리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란 대표는 “원유값이 배럴당 20달러까지 떨어지더라도 생산량을 늘리겠다”는 배수진까지 쳤다. 이 엄포의 속뜻은 사우디의 감산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자국의 증산만큼 사우디가 생산을 줄여 원유값 하락을 막아달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사우디로선 아량을 베풀 처지가 아니다. 아랍 민주화의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국 내 복지 투자를 늘리고 있어서다. 2015년 초부턴 적자 재정이 불가피하다. 미·유럽의 에너지 전문가들은 90년대에 이어 제2차 가격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한다.

요즘 글로벌 에너지 시장은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상태다. 전 세계적으로 셰일가스 붐이 불고, 미국은 원유 생산을 늘리고 있다. 여기에다 OPEC의 가격전쟁까지 더해진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10여 년간 계속된 고유가 시대의 끝이다. 한국 경제엔 반가운 소식이지만 에너지펀드 투자자들에겐 불길한 조짐이다. 종말론 같은 단순한 사실을 맹신하다간 승자가 되기 어려운 게 금융 시장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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