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두 송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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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저녁나절 외출에서 돌아오니 현관에 큼직한 운동화 두 켤레가 놓였다. 누굴까? 다급해지는 마음으로 들어서는 내게 영환이와 성남이가 꾸벅 고개를 숙인다. 한 다발 꽃을 들고-.
그 순간 선생님으로서의 나의 옛날이 얼핏 스쳐가고 그 속에 언제나 맑게 빛나던 눈망울들」. 담임했던 소년들이다.
며칠 전 전화로 놀러오겠다더니 마침 월말고사를 끝내고 왔노란다.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 제법 자신의 길을 눈 여겨 주시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새삼 속으로 끄덕이며 하얀 종이에 곱게 싸인 장미 두 송이에 눈길을 멈춘다. 엷은 「오린지」색깔이 감도는 분홍 장미다.
주먹만큼이나 심한, 아직은 한 두잎 벌어진 봉오리다.
문득 방금 보고 온 영화 속의 일가가 생각난다. 「로빈슨가의 모험」이라는 제목 속에 무인도에 피는 단란한 가정이야기였다. 그들 중의 아무도 난파선의 절망을 슬퍼하지 않았다. 새로 부딪친 현실에 출실히 서서 서로 돕고 서로 아끼는, 그러면서도 무리 없이 선택되는 자신들의 내일…. 자연 속에서 맑게 순화된 인간성이 비록 영화지만 부럽기만 했다.
소년들이 돌아간 후 다섯 살 짜리 준이와 함께 꽃가지를 다듬고 꽃 그릇에 장미를 꽂았다. 『엄마, 이 갈대도 같이 꽂아 그리고 현관에 놓으면 좋겠지?』『엄마, 오늘 아빠가 일찍 오시면 아마 깜짝 놀랄 거야.』자기 의견대로 마련된 작은 꽃 단지에 한층 신이 난 준이와 나는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정성스럽게 집안을 치우고 혼자 웃는다. 갈대 앞에 핀 작은 꿈을 보면서…. 고달픈 몸으로 돌아올 아빠 눈에도 환희 띄었으면.
모랫벌처럼 삭막한 생활 속에 미소를 마련하기란 참으로 힘겨운 일이지만 때론 이렇게 작은 데서 비롯되기도 한다고-. 조금은 무뚝뚝한 소년들이 두고 간 미소가 오래오래 우리 집안에 머무르기를-. 그리고 밝은 햇살 속에 환하게 웃는 장미처럼 나의 옛 소년들의 찬란한 내일을 손 모아 본다.<이영성(강원도 춘천시 문교동 161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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