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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덕과 향기"|일본 문헌에 나타난 「줄리아」의 행적|명문의 딸, 고향은 서울·평양·진주 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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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임진왜란 때 겨우 3살의 어린 나이로 일본에 붙들려 와 자라서는 천주교에 귀의, 끝내 배교를 거절함으로써 20여세에 절해의 고도에 유배되어 1651년 60여세로 비운의 생애를 마친 순절의 한 한국 여인이 3백80년만에 한줌의 흙으로 슬픈 귀국을 한다. 동경서 남쪽으로 1백70·4km, 망망한 대해 속의 외딴섬 「고으즈지마」 (신진도) 에 있는 유형 자들의 묘지에는 특이한 모양의 묘표가 세워진 신비한 무덤 하나가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이 무덤의 임자가 순교한 한국 여인「오다·줄리아」로 밝혀진 것은 불과 7년전 일. 동경의 문화재 전문가가 이를 조사, 확인한 것이다. 그 유덕을 기린 도민들은 3년 전부터 해마다「줄리아」제를 지내 오다가 이번에 무덤의 흙이나마 고국에 돌려보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한국 여성으로서「줄리아」만큼 일본 내외의 각종 문헌에서 많이 언급된 여인은 없다. 「비스카이느」 의『금은도 탐험보고』,「파제스」 의 『일본 「크리스천」 종문사』 , 「크라세」의 『일본 서교사』 에 한결같이 언급돼 있고 이밖에도 일본서 소설 또는 영화화된「줄리아」전기들이 있으며 17, 18년 전에 발간된 「로마」교황청 자료, 대영 박물관에서 나온 「무뇨스」보고서, 그리고 최근에는「줄리아」가 유배되던 다음해인 1613년에 일본서 기술된 「로도리고·지란」 신부의 일본 예수회 통신 (고대「이탈리아」 어)이 발견되어「줄리아」의 행적에 대한 결정적 윤곽이 드러났다. 물론 아직도 여러 부분에서 의문스러운 점과 쟁점이 남아 있으나 이들 문헌을 종합해 보면 「줄리아」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을 충분히 파악할 수가 있다.
▲출신=귀족 또는 고관의 딸로서 명문 출신이며 고향은 「줄리아」를 양녀로 데려간 왜장 소서행장의 임진란 당시 침공 경로로 봐서 평양 서울 진주 설이 있는데 전해지는「줄리아」의 용모와 성품 등으로 미루어 평양 설이 가장 유력하나 다만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
▲도일 경로=전쟁통에 고아가 된 「줄리아」를 발견한 소서행장이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데려다 양녀로 삼아 처 「주스터」를 시켜 양육했다.
「줄리아」는 영세명이며 후에 「카톨릭」신자가 된 것도 「주스터」 (역시 영세명) 의 영향이었다.
소서행장에 의해 발견된 때의 나이는 3살. 자식이 없고 「크리스천」 가정이었던 소서행장의 양녀 시절은 「줄리아」 에게는 행복했던 시기였다.
▲소서행장으로부터 덕천가강에게로=10살 갓 넘었을 때 「세끼가하라」싸움(1600년)이 일어나 가장의 손으로 넘어갔으나 경로는 분명치 않다. 이후 가장의 총애 받는 시녀로서 성중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으며 한때 가장이 그녀를 범하려 했으나 완강히 이를 거부, 정절을 지켰다.
▲성품과 용모=모든 문헌이 한결같이 「줄리아」의 용모가 뛰어나고 재기가 발랄했으며 자상하면서도 범하기 어려운 기품을 지녔고 또한 지덕을 겸비했으면서 다정 다감한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의 외국 선교사들은 「줄리아」를 『가시밭 속의 장미』, 『 「크리스천」으로서의 덕과 향기』 등의 표현으로 칭찬하고 있으며 『금은도 탐험보고』 는 『장난감과 유리제품을 주었더니 「줄리아」는 「로사리오」 (묵주) 와 성상만을 갖고 싶어했다』 고 그녀의 높은 신앙심을 격찬하고 있다.
▲유배의 계기=1612년 「줄리아」가 20여세 때 가장은 금구령을 내리고 측근을 시켜「줄리아」 에게 개종을 강요했다.
가장의 지시를 받은 시녀들이 「줄리아」에게 그녀를 아껴 온 가장의 은혜를 강조하면서 하다못해 겉으로나마 개종하라고 설득했으나 「줄리아」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은혜는 알지만 뜬 구름 같은 이 세상의 부귀에 마음을 빼앗겨 양심을 굽히고 신의 은총을 저버릴 수는 없다』 고 끝내 거절했다.
할 수없이 가장은 「줄리아」를 유배토록 명령했으나 미련을 버리지 못해 유배 길에서도 설득을 계속하도록 지시했는데 「줄리아」는 이 선고를 천주님의 배려라고 기뻐했다.
▲유배의 도정=가장의 성 즉 지금의 정강에서 험준한 「쥬우꼬꾸」 (십국) 고개를 넘어 망대까지 「줄리아」는 가마를 타고 갔으나 도중에 자청해서 가마를 내려 맨발로 자갈길을 걸어가는 고통을 감수했으며, 망대에 도착하자 일본 기독교 교회 장이며 신부인「프랑스」신부에게 편지를 띄워 『앞으로 닥칠 어떤 고통과 고난도 참고 견딜 생각』이라고 하고서「미사」용구를 보내 주도록 간청했다.
망대에서 대도까지는 96km, 「줄리아」는 대도에 약1개월간 머무른 다음 다시 신도로 옮겨졌다. 여기서 「줄리아」는 함께 시녀로 있다가 역시 개종을 거부, 유배된 「루시어」및 「클라러」를 만나 반가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가장은 이들이 함께 있으면 「줄리아」의 신앙심이 더욱 굳어질 것을 염려, 보름만에 다시 신진도로 옮기게 했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조건의 신진도에서도 「줄리아」는 신부에게 제단을 만드는데 필요한 기구와·순교자 및 성 동정녀들의 생애에 관한 책, 그리고 다른 신자들의 동태 및 박해의 상황을 알려주도록 편지를 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렇듯 가혹한 환경에서도 가장 괴로운 것은 고해와 성체 배령을 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렇듯 굳은 「줄리아」의 신앙심은 이를 일본인 신자 「하라·몬드」로부터 전해들은 역시 임진난 당시의 한인 포로 2세로서 신고가 된「레오·다께시찌」로 하여금 혼연히 죽음을 택하게 했다는 얘기도 있다. 「줄리아」의 사후 1867년7월 「노마」교황 「비오」9세는 「줄리아」 등 9명의 한국인 순교자를 포함한 2백5위의 일본 순교복자들에게 시복 했으며 얼마전 한국 측에서 「줄리아」를 한국의 순교자로 추가할 것을 희망했으나 일본「가톨릭」교회는 일본에서「줄리아」를 계속 존숭할 것을 희망,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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