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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휴전회담 카드로 '옹진군 포기' 준비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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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33년 만에 새로 발간한 ?6·25전쟁사?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김상원 부장(왼쪽)과 남정옥 책임연구원.

#1952년 12월 마크 클라크 제3대 유엔군사령관은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서울 동숭동 미8군사령부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클라크는 대규모 대북 공세를 위해 강원도 원산 일대에 기습 상륙작전을 건의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작전 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은 1951년 1·4후퇴를 단행했다. 파죽지세로 북위 37도선(평택-안성-원주-삼척)까지 남진하던 중공군은 뜻밖에 주춤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더 밀고 내려가라”고 했지만 펑더화이(彭德懷)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 같은 또 다른 상륙작전의 함정이 있을 수 있다”며 남진 속도를 조절했다.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이양구 소장)가 미국·중국·러시아 등의 기밀 해제 문서와 국내외 각종 기록물을 종합해 2003년부터 11년 만에 완간한 11권짜리 『6·25전쟁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원산 상륙작전 시도는 미국 측 문서에, 중공군이 남진을 멈춘 일화는 중국 측 문서에 근거했다.

 북한은 1960년대 『조국해방전사』를 먼저 발간해 영문판을 해외에 뿌렸다. 이에 박정희 당시 대통령 지시로 1970년부터 80년까지 11년간 11권의 『한국전쟁사』를 발간했었다. 이를 33년 만에 새로 쓴 것이다. 편찬 자문위원장은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이 맡았다.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의 해에 새로 발간된 『6·25전쟁사』의 가장 큰 의미는 객관성과 균형이다. 기존 『한국전쟁사』는 70년대까지 공개된 미국 등의 기록과 전쟁 생존자들의 증언에 기초했다. 반면 『6·25전쟁사』는 80∼90년대 소련과 동유럽 붕괴 이후 공개된 각종 자료뿐 아니라 80년대 이후 새로 기밀 해제된 미 국무부·국방부·중앙정보국(CIA)·국가안보회의(NSC) 등의 문서를 반영했다.

 예컨대 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미 합참은 휴전회담 담판 중에 거래가 필요하면 옹진군(현재의 북한지역)을 포기해도 좋다는 지침을 하달했다는 기술도 추가됐다. 옹진군은 2011년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북한군의 해안포대가 집중 배치된 지역이다. 또 94년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선물한 ‘한국전쟁 관련 소련 극비 외교문서(일명 ‘옐친 문서’)’뿐 아니라 중국군사과학원이 2000년대에 발간한 『항미원조전쟁사』 등 중국 측 자료도 폭넓게 참고했다. 『6·25전쟁사』의 또 다른 의미는 전쟁 발발 원인과 경위를 서술하면서 ‘김일성이 스탈린의 승인과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아 수행한 불법 남침 전쟁’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했다는 점이다.

 김상원 군사편찬연구소 국제전쟁사부 부장(국제정치학 박사·예비역 대령)은 “그동안 전쟁 발발 원인과 경위에 대해 일각에서 북침설을 주장할 만큼 혼선도 있었지만 새로운 자료를 대폭 보강해 소모적인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6·25전쟁사』 4300세트를 정부 기관, 주요 도서관, 군부대 등에 보내고 콤팩트디스크(CD)로도 제작했다. 조만간 홈페이지(www.imhc.mil.kr)에서도 내려받을 수 있다. 11권 완간 기념으로 ‘정전협정의 특징과 역사적 의미’란 주제의 학술대회와 출판기념회가 12일 오후 1시 전쟁기념관에서 열린다.

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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