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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제27화>경·평 축구전(15)|이혜봉(제자 이혜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제2회 대항전>
제2회 경·평 대항전의 1차전은 34년 4월6일 배재고 야구장에서 열렸다.
경성군은 그 전해에 평양 대회에 나갔었던 「멤버」가 중심이었으나 추가된 「멤버」로는 연전계통이 많이 끼었다.
박석련 전인수 이갑석 유희춘 김경한 등이 그들이었는데 이같이 연전 계열의 선수가 많이 끼게 된 것은 이영민 자신이 연전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보전출신의 김원겸은 전경성이나 조선축구단을 조직할 때도 그렇게 보전 색채를 내지 않아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한편 평양군은 그 「멤버」가 1회 대회 「멤버」그대로 였다.
경성군에 뛰지도 않을 후보「멤버」가 이영민에 의해 많이 끼게 된 것은 그 때의 사회 풍조 때문인가도 생각된다.
당시의 사회는 지금보다 다양치 못하고 워낙 경성이라 해도 바닥이 좁아 서로 알 수 있는 사람은 다 알 수 있었지만 그만큼 신문이나 방송도 지금처럼 활발치 못해 자기 이름이 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신문에 자기이름이 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있어서 후보라도 자리다툼을 하는 판이었으니까 이영민이가 자기 계열의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넣었던 것 같다.
인천에서 몰래 빠져나온 나와 채금석 최성손은 「게임」 30분 전에 배재 운동장에 도착했다.
가서보니「스탠드」가 없는 그 운동장에는 1만 여명의 대 관중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겨우 사람들 틈을 빠져 들어가니 여기저기서 채금석이를 보고는 「오토바이」가 왔다고 수군거렸다. 누구보다도 우리의 도착을 제일 기뻐한 것은 이영민이었다.
경성군의 중심 「맴버」인 우리가 조선 축구단을 따라 인천으로 이미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있던 참이라 이영민은 퍽 실망하고 있었는데 아무 연락 없이 우리가 도착했으니 얼마나 기뻐했겠는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경성군은 1차전에서 0-2로 졌다.
정확한 기록이나 기억이 없어서 그때 평양군의 어느 누가 「골」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평양군은 잘하기도 했고 까기도 잘했다.
내가「골·키퍼」였으니까 특히 문전에서 평양군이 어떻게 깠는지를 이야기 해보자.
「센터·하프」인 강기순은 까는 것이 우악스러워 마구 후두르는 타입이었다. 그는 볼과 상대방을 한꺼번에 차는데 한 번 채면 으드득 소리가 나는 듯 했다.
그 반면 포워드의 박의현은 후두르는 것이 아니라 톡톡 건드리는 타입이어서 기술적인 차징을 잘했다.
만약에 코너·킥이 나오면 그는 내 앞에 서 있다가 내가 점프해서 볼을 받으려면 내 팬츠를 잡아 볼을 놓치게 하는 것이다.
그때의 심판으로는 이인규·정문기·현정주씨 등이 많이 봤는데 그때 나는 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상대방 선수를 보다가 박의현 등이 붙어서 내 팬츠를 잡으려 하면 『선생님』 『선생님』하고 심판을 불러 주의를 환기시켰으나 아무리 옛날 이야기로서니 우습지 않을 수 없다.
2차전은 7일에 열렸는데 그때도 관중들은 말리다 못해 「라인」까지 거의 다 들어왔다.
이날도 「게임」은 거칠었다. 경성군의 CH 정용수가 깨여 퇴장 당했다. 경성군은 1차전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안간힘을 내대가 35분 LW 한갑석이 「슛」 한 것이 「골·인」이 되어 전반을l-0으로 「리드」했다. 워낙 「레프트·윙」자리는 채금석의 자리였는데 1차전에서 지고 난 후는 「포지션」을 바꿔 싸우느라고 한갑석이 그 위치를 지켰던 것이다.
후반에 들어서도 경성군은 우세를 보이다가 CF 최성손이 15분만에 한 「골」을 넣어 2-0까지 「리드」했다.
그러나 평양군도 거한인 CF 김성간이 단독으로 치고 들어와 1점을 만회했다.
내 기억으로는 그 큰 몸집의 김성간이 치고 들어오면서 「슛」을 했는데 워낙 거리가 가깝고 볼이 강해 막을 엄두조차 못 냈던 것 같다.
평양군은 36분에 LI 이정식이 다시 김성간의 「패스」를 받아 「슛」한 것이 「골·인」 되어 2-2로 비기고 말았다.
그때의 내 신문 「스크랩」을 보니까 2차전에서 2-2로 비겼기 때문에 3차 전이나 다름없는 결승전을 다음달 8일에 한다고 했지만 그 「게임」을 했는지 안했는지 내 기억이 없다.
또한 내 「스크랩」에도 없어서 나로서는 3차전을 하지 않고 2차전으로 끝낸 것이라 단정하고 싶다.
왜냐하면 경·평 대항전은 당초부터 1, 2차전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전해인 평양에서는 3차전을 했지만 이는 대회 규정에 따라 1, 2차전이 비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경성 대회는 2차전을 2-2로 비겼지 1차전을 평양군이 2-0으로 이겼기 때문에 이제 2회 대회는 평양군의 1승 1무승부로 끝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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