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살림] 누가 내 통장을 기웃거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6면

#직장인 朴모씨는 친구에게 돈을 부쳐야 하는데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직접 하지 못하고 경리담당 여직원에게 부탁했다. 인터넷 뱅킹의 계좌이체 거래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메모해준 뒤 외출한 것이다.

경리담당 여직원은 얼마후 퇴직을 했는데 메모를 보관했다가 朴씨 통장에서 돈을 빼갔다.

#주부인 李모씨는 택시에서 폰뱅킹을 이용해 아들의 과외비를 부치고 난 뒤 깜빡 잊고 휴대전화를 놓고 내렸다.

이 전화를 주은 한 대학생이 재발신 버튼을 누르니 액정화면에 李씨가 폰뱅킹 거래때 눌렀던 계좌번호 및 비밀번호 등이 고스란히 떴다.이 대학생은 각종 정보를 챙겨놓았다가 李씨의 통장에서 자기 통장으로 돈을 빼돌렸다.

#식당을 운영하는 金모씨는 지난해 급히 돈이 필요해 사채업자를 찾아갔더니 A은행의 인터넷 뱅킹에 가입하고 오라고 했다.ID와 계좌이체때 필요한 비밀번호까지 지정해주었다.

金씨는 급전을 빌려쓰기 위해 인터넷 뱅킹에 가입한 뒤 은행에서 받은 보안카드까지 복사해줬다.얼마전 자기 계좌에서 뭉칫돈이 빠져나갔길래 깜짝 놀라 은행에 알아보니 그때 그 사채업자의 소행이었다.

모 시중은행이 최근 파악한 전자금융 사고의 사례들이다. 싸고 편하게 은행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폰 뱅킹과 인터넷 뱅킹의 이용자가 날이 갈수록 증가하면서 관련 사고도 덩달아 늘어나는 추세다. 자기도 모르게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간 걸 발견하면 대부분이 "은행 잘못 아니냐" "해킹당한 것 같다"며 아우성을 친다.

지금까지 사회 문제가 됐던 몇몇 금융사고의 경우 조사 결과 은행 측 직원이 연루된 범죄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은 대다수 사고는 위의 사례들처럼 고객들 본인의 부주의에서 비롯됐다는 게 은행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지금까지 빈번하게 발생한 전자금융 사고의 유형을 살펴봐도 ▶통장이나 수첩에 비밀번호를 써놓았다가 분실.도난당하는 경우▶다른 사람에게 거래를 맡기는 경우▶액정 창에 발신번호가 뜨는 전화기를 이용해 폰 뱅킹을 했다가 그 전화를 다른 사람이 쓰면서 정보가 드러난 경우▶암호나 비밀번호를 생년월일.전화번호.자동차 번호판 등 다른 사람이 쉽게 추정할 수 있는 번호로 설정하는 경우▶전화로 은행원을 사칭하며 암호나 비밀번호를 묻는 사람에게 속아서 알려준 경우▶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면서 그 대가로 폰 뱅킹.인터넷 뱅킹에 가입한 뒤 비밀번호 및 보안카드를 건네준 경우▶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PC방에서 인터넷뱅킹을 이용했다가 주위 사람에게 정보가 노출되는 경우 등 고객 과실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전자금융사고라고 하면 얼핏 떠올릴 해킹에 의한 피해는 국내 은행권에선 아직까지 신고된 적이 없다고 한다.

문제는 이처럼 어떤 식으로든 고객에게 원인이 있는 사고는 보상받을 길이 막막하다는 점이다.

현행 '전자금융거래 표준약관'에 따르면 고객의 과실없이 발생한 사고나 원인이 불분명한 사고, 은행과 고객 모두에게 과실이 없는 사고의 경우엔 은행이 위험을 부담하도록 되어 있다. 예컨대 은행 직원의 범죄나 제3자의 해킹으로 피해를 본 고객은 얼마든지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2중 3중으로 돼 있는 비밀번호를 타인이 알도록 했다든가, 자기 PC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해킹의 위험에 방치해 놓는 행위 등은 명백한 고객의 과실이므로 보상받기 힘들다."(강성범 금융감독원 은행.비은행분쟁조정팀장)

방법은 고객 스스로 조심 또 조심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전자금융으로 인한 사고를 막을 수 있을까.

우선 은행 거래를 할 때 필요한 모든 개인 정보를 철저히 관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예를 들자면 은행 지점에서 인터넷 뱅킹을 신청할 때만 해도 노출된 환경에서 주민등록번호.이름.ID.계좌번호 등을 써넣게 되는데 주변에서 이 내용을 보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잊어버리기 쉽다며 각종 암호나 비밀번호를 수첩 한 페이지에 모두 적어 놓는 것도 위험 천만한 일이다.

굳이 적어 놓지 않아도 외울 수 있는 ID와 비밀번호를 사용하되 이따금 새 것으로 변경하는 게 좋다. 혹 비밀번호를 적은 수첩이나 보안카드를 분실.도난당했을 때는 곧장 은행 지점을 찾아가 신고하고 재발급받아야 한다.

이외에도 유의해야 할 점이 더 있다. PC방이나 사무실의 공동 PC 등에서 인터넷 뱅킹을 이용하는 건 금물이다. 자신만 쓰는 PC를 사용하되 바이러스나 해킹에 대비해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인터넷 뱅킹에 접속할 때 은행이 제공하는 해킹방지 프로그램을 구동시키는 건 필수다.

폰 뱅킹을 할 때는 발신번호가 창에 표시되는 전화기는 가능한 한 이용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 처음에 폰 뱅킹이나 인터넷 뱅킹을 신청할 때 1회 이체한도나 1일 이체한도를 적정선에서 설정해 놓는 것도 잊지 말자. 거액을 거래할 일도 별로 없는 개인이 몇 천만원씩 한도를 설정해 놓을 이유가 없다.

최근 은행마다 앞다퉈 전자금융에 대한 보안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이용할 만하다.

폰 뱅킹이나 인터넷 뱅킹으로 거래가 발생할 때마다 고객의 휴대전화로 알려주는 문자메시지 서비스(SMS)가 대표적이다. 약간의 수수료를 받는 곳도 있긴 하지만 불의의 사고를 재빨리 체크할 수 있어 유용하다.

또 인터넷 뱅킹시 사용하는 보안카드를 폰 뱅킹에도 도입하는 은행들이 많아졌다. 예전엔 폰 뱅킹에 보안카드를 쓰지 않도록 하거나 거액 거래에만 선별적으로 이용하게 했었다. 다소 귀찮더라도 보안카드만큼 강력한 안전장치도 없는 만큼 반드시 쓰는 편이 바람직하다.

"전자금융은 편리함 때문에 급성장했지만 이제 안전함을 함께 추구하는 쪽으로 인식 전환을 해야 한다"고 이성규 국민은행 부행장(전자금융 담당)은 말한다. 전자금융의 두 얼굴(편리함, 사고위험)이 다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글=신예리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