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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점서 맴도는 수사 8일|국민은행 아현동 지점 고객 납치사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범인은 날고 경찰은 긴다. 사건발생 8일이 지나도록 원점에서 맴돌고있는 국민은행 아현동 지점 예금주 이정수씨 피납사건은 기동·지능화한 강력범에 허를 찔린 거북이 걸음식 경찰수사의 민망한 허탈을 드러나게 했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수사에 나선 경찰이 「신속착수」 라는 초동수사의 초보적인 원칙부터 지키지 않은데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사건당일인 지난12일 관할마포경찰서에 사건이 맨 처음 신고된 것은 발생 10분이 지난 상오11시20분쯤. 신고자는 당시 사건현장인 국민은행 아현동 지점에서 약2㎞ 떨어진 마포구 공덕동156 공덕병원 앞을 걸어가던 김대수씨(52·공덕동153).
김씨는 아현동에서 마포종점 쪽으로 달리던 검은색구형「코티나」에서 「꽝」하는 총성이 울리면서 앞서가던 박정순씨(38·여)가 주저앉는 것을 보고 약3m 떨어진 공덕의원으로 달려가『차에서 총을 쏘아 사람이 다쳤다』고 112에 신고했던 것.
당시 마포서 수사요원들은 모두 북적 대표단의 입경 연도경비에 나가고 보호실 감시요원 4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관용「넘버」를 단 검은색 구형 「코티나」를 검문하라』는 지령이 서울대교경찰관초소에 내린 것은 사건발생 12분만인 상오 11시22분쯤.
이때는 이미 시속60㎞ 이상으로 달린 범행 차가 서울대교를 지나 자취를 감춘 뒤였다.
초동 수사반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그보다 늦은 낮12시20분쯤.
사건발생 1시간이 지난 뒤였다.
이 때 현장에는 총에 맞아 쓰러진 박씨를 병원에 옮겼던 목격자들이 대부분 이미 자리를 떠버린 뒤였다.
경찰이 찾아낸 목격자는 신고를 했던 김씨와 공덕의원 앞에 있던 김만춘씨(40). 두 김씨는 『흑색 「코티나」에서 총성이 나면서 뒤쪽 차창이 깨어졌다. 차안에는 앞자리에 운전사와 뒷자리에 회색「잠바」 차림의 30대 청년이 다른 l명과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내용.
이때까지 경찰은 단순한 총기사고로 추정, 차량수배전통만 내렸으나 가장 가까운 서대문서에 통보된 것이 상오11시40분. 범인들이 탄 차가 수도권을 오래 전에 벗어날 만큼 뒤늦은 때였다.
이씨의 납치사실이 가족들에 의해서 경찰에 신고된 것은 이날 하오 1시쯤.
신고를 받은 마포서 형사 1반장 이황훈 경위가 국민은행 아현 지점에 출동, 탐문수사를 벌인 끝에 이씨가 경찰관차림의 괴한에게 강제로 차에 실려갔다는 사실을 밝혀내고서야 제2현장의 총기사고가 이씨의 피납과 관련된 것을 알았다.
그러나 경찰은 사건발생 4일이 지난 지난16일에야 피해자 이씨의 사진6만장을 인쇄, 서울시내 각 통반과 경기도 일원에 배포했다. 더구나 서울근교 야산 등 시체유기용의장소 수색은 지난 19일에야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또 범인수사도 지난16일에야 범인「몽타지」사진을 배포했다. 경찰은 처음 마땅히 했어야 할 은행고객들의 시간별 현금인출상황조차도 조사하지 않아 범인들이 이씨가 돈을 찾아 나오는 것을 미리 알고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는지, 또는 우발적으로 은행 앞에서 기다리다 돈 뭉치를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범행한 것인지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또 이번 사건에서 경찰은 범인들이 쏜 총탄2발을 현장에서 수거, 감정을 의뢰 「카빈」실탄임을 밝혀냈으나 발사물 등록이 전혀 돼있지 않아 사용된 총기의 출처나 소지자를 밝혀내는데 난관에 부딪쳤다.
모처럼 수거한 유루품도 수사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경찰은 이번 사건의 해결의 키인 차량수사를 사건발생 4일이 지난16일부터 무허가정비업소 등을 대상으로 용의차량수사에 나섰다.
경찰은 2일이 걸려서야 서울시내 92개의 무허가정비업소명단을 작성할 수 있었으나 단서는 잡지 못했다. 초동수사단계의 이 같은 시간낭비는 범인들에게 도주할 시간적 여유와 범행차량의 증거인멸에 충분한 시간을 준 결과를 빚었다고 일부수사간부들이 지적하고있다. 범인들이 깨어진 유리를 갈아 끼우는데 필요한시간은 40분이면 족하다는 경찰의 분석. 경찰수사는 사건발생 8일이 지나도록 사건해결의 실마리는 물론 피해자 이씨의 생사여부도 가려내지 못하고있다.
피해자 이씨의 가족들은『집을 팔아서라도 수사비를 대겠으니 이씨의 행방을 밝혀달라』고 경찰에 애원하고 있다.
경찰은 20일까지도 피해자 이씨의 행방을 찾는데 실패하자 수사력을 차량수배에 집중키로 했다.
그러나 수사본부의 한 고위수사간부는 『차량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 데다 그 동안 벌여온 수사의 결과도 신통치 않다』고 말해 수사는 장기화할 것을 시사하고있었다. <고정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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