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의 사상 2개의 입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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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3일 서울에서 열린 남북 적십자 제2차 본 회담은 2시간여에 걸친 회의 끝에 아무런 합의 없이 폐막되었다. 이 회의에서 한적 측 대표와 자문위원, 그리고 이산 가족을 대표한 이화여대 김 총장 등은 적십자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회담을 빨리 진행시키고 결실 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북 적 측 대표는 정치 색을 띤 연설을 했는데 북 적 측 자문위원은 축하 연설을 빙자하여 회담의 기본 정신과는 전혀 동떨어진 정치적인 선동을 한 것이다.
원래가 서울 회담은 지난번 평양 회담이 적십자 본 회담의 개막 축전 비슷한 것으로 끝났던 것처럼 남한에서의 개막 축전이 된 것이요, 따라서 회담에 실질적인 진전이 있으리라고 기대를 걸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 회담에다가 단순히 개막 축전으로서의 의의 밖에 부여치 않을 셈치고라도 회담의 진행 상황과 경과는 우리 국민의 염원과 기대에 너무도 빗나간 것이었다. 그것은 북적 측이 이 회담을 통해서 흩어진 가족 찾기라는 민족의 숙원을 풀어 줄 생각은 별로 아니 하고 회담 자리를 빌어 공산주의 정치 선전을 펴는데 주력했기 때문이라 단정할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느 회합에 나타나서도 공산주의 선전을 벌이는 버릇이 있다. 이 버릇이 생리화한 북한측 일행이 적십자 회담을 정치 회담으로 변질, 타락시키려는 저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에 회담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북적 대표 일행을 평화 사절로서 따뜻하게 맞이했던 우리 국민들에게도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대남 정치 공세의 일환으로서 남북 정치 협상 개최를 강력히 주장해온 북한 공산당은 한국이 이를 근본적으로 묵살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자 적십자 회담의 계속을 기화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회담을 정치 협상으로 변질시키고자 책동하고 있다. 우리는 남북간의 대화가 정치 협상으로 발전하는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4반세기에 걸친 남북 분단 대립의 역사적 현실이 가혹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남북은 서로 대화를 지속해 나가되 ①적십자 회담을 통해서 인도 문제를 해결하고 ②비정치적 분야-예컨대 체육·예술·과학·기술에서 접촉·교류 문제를 대화로써 해결 짓고 ③남북 간에 동족 의식이 회복되어 협상에 의한 화해 「무드」가 성립되면 맨 나중에 정치 협상을 열어 평화 공존이나 통일 문제를 협의한다는 순위를 설정하고, 그 순위에 따라서 남북 관계를 개선코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적십자 회담을 통해서 인도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비정치적 분야에서의 교류를 위한 대화가 무의미하고 또 비정치 분야에서의 교류가 행해지지 않는 한 정치 회담의 개최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공산당이 우리처럼 단계적인 해빙을 시도치 않고 일거에 정치 협상을 열어 통일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것이 남북간의 정치적 대립을 가승 시키는 점에 있어서 화해의 기미에 정히 역행하는 것으로 단정하고 정치 협상의 조기 개최를 단호히 반대하는 것이다.
이번 서울 회담은 적십자 인도 정신에 입각하여 이산 가족 찾기의 피맺힌 숙원을 하루 속히 풀어주려는 한적 측의 입장과 적십자 회담을 열기는 하되 인도적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별 관심이 없고, 회담을 정치화하려는 북적 측의 입장이 뚜렷이 대립하고 있음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여기서 어느 쪽의 입장이 옳은가. 적십자 회담이 비정치 회담이요, 인도 문제 해결을 위한 회합이라고 하면 한적 측의 입장이 옳다는 것은 구차스러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앞으로 북적 측은 남북이 적십자 회담을 열게된 동기가 무엇이며 또 이 회담이 추구하고 있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깊이 반성하고 이 회담을 악용하여 유치한 정치 선전이나 벌이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적십자 인도주의 정신에 되돌아와 회담 진행에 임해주기를 바란다.
평양 회담이나 서울 회담의 진행 상황은 「매스컴」을 통해서 그 전모가 우리 사회에 대중 전달되었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선전의 무대를 제공해준 결과가 되었다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는 국민도 적지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회담 상황의 대중 전달은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공산주의자들의 정체가 무엇인가, 또 공산주의자와 협상을 벌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게 하였으므로 남북 관계가 쉽게 개선되리라 던 환상적인 기대를 깨고 공산당과도 쉽사리 평화 공존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뒤집어엎은 점에 있어서 좋은 교재가 되었음을 부인치 못한다.
앞으로의 회담 전망은 낙관도 비관도 불허한다. 왜냐하면 북한이 적십자 회담을 제아무리 정치화하고자 책동한다 하더라도 그 불순한 책동은 민족적·대중적 저항으로 말미암아 수포에 돌아갈 것이요, 결국 공산당도 적십자 회담을 진정한 적십자 회담으로 진행시키는 수밖에는 딴 도리가 없겠기 때문이다. 한 적의 대표나 자문위원은 물론, 우리 정부도 언론 기관도 국민 대중도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 나가면서 회담을 성공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인데 회담을 계속 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앞으로도 계속 인내의 미덕 발휘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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