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산한 시가 「체제의 소산」으로 당연|주목되는 기성세대와의 접촉 차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대담 차병권<서울대상대교수> 신상초<본사논설위원>
때:9월3일 낮
곳:중앙일보회의실

<회담개막자체에 큰 의의>
신=이번 평양회의의 구제적성과는 예비회담에서 합의된 5개항의 협의사항을 재확인하고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하여 남북적십자회의를 계속해 나간다는 것과 7·4공동성명에 따른 통일의 디딤돌을 마련한다는 점에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것 등이 되겠으나 이것보다는 오히려 회담이 개막됐다는 사실과 극히 제한된 범위기는 하나 북한의 실정을 알 수 있는 계기였다는 점에 보다 큰 의의가 있다고 보겠읍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무 희생없는 교섭이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시간은 걸렸지만 휴전회담때처럼 목슴의 희생이 없읍니다.
휴전회담 당시는 매일 수천명에서 수십명이 죽어가는 상황아래서도 회담이 2년이나 끌었던 점을 상기한다면 적십자회담이 장기화 될 것이라는 전망은 쉽게 판단되지요.
회담의 의제·장소 등 5개항을 합의하는데 예비회담이 1년이나 걸린 사실을 감안한다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외국적십자간의 회담이라면 이만한 합의에 도달하기까지는 불과2,3일, 길어도 1주일이면 타결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평양회담을 통해 이제까지 남북한의 특수사정에 의해 보도금지령역이던 북한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큰 소득입니다.
차=우리측이 인도적 입장을 강조하여 회담을 비정치적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데 비해 북한측이8개 정당·사회단체대표의 연설을 통해 정치적 색채를 자꾸 가미시키려고 한 점으로 보아 회담은 장기화하겠지요.
그러나 이런 시간적인 전망과는 상관없이 실질적인 인사교류가 시작됐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외국인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그러했겠지만 이번에도 선택된 범위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실제생활이나 산업을 알 수는 없었지만 북한이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실시한지 15년이 지난 오늘에도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제약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공산주의국가가 그렇지만 북한도 생산량의 25%이상을 저축에 돌려 공업화와 국방력강화에 경주했던 관계로 국민소비생활이나 사회시설 확충에는 손을 못 댄 것도 사실입니다.
북한이 신6개년계획을 시작하여 높은 성장율을 기록하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지만「자기완결적」인 공업체제를 지향하고 있는 북한의 특성으로 보아 앞으로 단시간안에 어떤 큰 변화가 있으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신=이번 보도진이 보낸 사진이나 기사를 보고 평양이 한산하다, 정돈이 돼 있다고 모두들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보거나 공산주의의 어떤 약점으로 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후세대와만 접촉시켜>
사회주의건설의 획일주의에서 나온 획일적 건설이니까 정돈이 돼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남녀노소 모두가 직장 일터에 나가고 있으니 한산한 것도 당연합니다.
한마디로 평양의 모습은 사회주의 「체제의 소산」 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차=북한의 소비생활이란 자유주의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지요. 여자의 옷이 단조롭고 머리형 남한에서 20년전 유행했던 「스타일」이라고 해서 웃고 넘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체제는 소득의 상당부분을 소비로 충당하지만 북한의 경우 일반소비생활부분보다 「아파트」·중화학공업·국방력 등에 대부분 쓰기 때문에 그 일면보다 조직사회의 그 저력도 깊이 생각하면 무서운 감이 듭니다.
신=북한여성이 화장을 안 하는 것을 얘기해도 그렇습니다.
중공이 아직껏 화장을 안 하고있고, 소련만도 1917년에 일어난 월 혁명이후 화강을 안 해오다가 1955년 「스탈린」사후 2년만에 「프라우다」지에서『여자의 화장이 무엇이 나쁘냐』는 논쟁이 벌어져 40넌만에 「퍼머」가 재등장했읍니다. 우리나라사람 가운데 잘 살고 못 살고 간에 아침부터 화장에 온 신경을 쏟는 것도 반성해야 되지 않을까요. 물론 북한의 경우 고도의 전쟁준비태세하에 있고 사회자체가 여자의 노동력을 남자의 노동력과 똑같이 취급한 탓으로 돌릴 수 있읍니다만….
평양거리가 한산하다는 것은 그들의 인구정책에도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들 공식발표로는 평양인구가 70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 정도나마 될 지 의심스럽습니다.
차=우리대표단이 탁아소를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도 퍽「쇼킹」한 「뉴스」라고 생각됩니다.
불과 5,6세밖에 안된 아동들이 『부모가 보고 싶지 않다』든가 혁명의 어머니라는 말에 비로소 우리 여자대표의 품에 안겼던 사실 등은 북한의 「이데올로기」교육이 얼마나 철저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 하겠읍니다.
신=한가지 또 특이한 사실은 북한의 우리대표단과 주민들간의 접촉이 불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소련이나 중공을 방문하는 외국인이 그 곳 주민들과의 자유로운 접촉은 금지되지만 부분적 접촉은 가능했던 것에 비해 북한에선 관전 차단됐었습니다.
특히 국민학교아동이나 여학생 등 20세 이하의 전후세대의 접촉은 가능케 했으면서 20대 이상의 세대에 차단한 점은 퍽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이제 자라나는 세대는 「유일사상」으로 완전히 산육했다는 자신을 갖고 있지만 기성세대에 대해서는 그런 자신을 못 가진게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차=생전 보지도 못한 「벤츠」행렬이 지나가는데도 거리의 아동이나 어른들이 전혀 무관심하게 지나가고 있었던 모습은 상식으로는 풀수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남북이 접촉하는 경우 그것은 외국사람이 접촉하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 아니겠읍니까.
우선 언어가 같으니 그만큼 동화되는 속도가 빠른 것이고 해서 북한지도자들이 엄격한 통제를 한 것 같습니다. 이제 대화의 문이 열리기는 했지만 참다운 대화의 문이 열리기까지에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 것인가는 아무도 예측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는 방식의 회담은 서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회담은 당장 뚜렷한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고 장기화한다고 봐야겠지요.
나는 남북교류 중 구체적으로 제일 빨리 될 것은 교역일 것으로 봅니다. 물건은 사상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상을 갖고 있으므로 서로 경계하게 되지만 서로 왔다 갔다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니고 묻어 다니는 것도 없지요.
그래서 사람의 교류는 오랜 시일이 걸리겠지만 물건은 경제적 가까운 시일 안에 이쪽에선 철광석같은 것을 먼 곳에서 가져올 필요없이 북쪽에서 가져오면 될 것이고 북한도 소비재를 일본에서 도입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남아돌아가는 것을 가져가면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차=교역문제는 빨리 되리라는 의견이 있으나 반면 힘들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좀 어렵다는 견해는 북한공업이 항상 자기완결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므로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북한이 수입해 들이는 것은 기계이고 그것을위해 농산물같은 것을 내보내는 것이므로 우리쪽에 과연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회계해야할 교섭의 영향>
경제적문제를 뗘나 정치적 차원에서 교역이 해결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면 저쪽의 경제 및 산업구조가 전제됩니다. 교역이 쌍방에 다 유리할지 모르나 문제는 북한의 공업화내지 생산계획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느냐는 것이지요.
신=그걸 좀 낙관적으로 보는 이유가 있어요. 동·서독의 경우 인적교류에 훨씬 앞서서 물적 교류가 있었습니다. 전반적인 것은 시간을 끌겠지만 개별적으로 단기적인 물물교역은 가능할 것입니다.
차=원래 교섭의 출발은 이산가족문제었으나 거기에도 난제는 있을 것 같아요. 인도주의적 목적은 순수하지만 사회적·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쉽지 않은 점이 있을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신=그것이 쉽게 안 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생사확인·주소확인·서신왕래·자유왕래·거주지선택 등 5가지 의제가 하나씩 분리돼서 처리된다면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쌍방체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전부를 일괄해서 타결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차=남북간 교류·교섭을 통해 양쪽이 받을수 있는 바람직한, 혹은 경계해야 할 영향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이쪽에서 통일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갖는다든지, 저쪽에서 사회밑바탕에서부터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든지 하는 문제들이 있을 것 같은데 교류나 교섭에서 파생될 영향은 어떤 것일까요.

<폐쇄뚫은 용기 배경 궁금>
신=그것은 남과 북의 상호교류를 통한 사회체제의 변질문제입니다. 그러한 변질은 천천히 오게되지 않을 까요. 왜냐하면 상대편 체제를 직접 눈으로 보면 자기사회의 특징이 무엇이고 강점·약점이 무엇이라는 것을 서로 알게 되니까 무언가 조금씩 바꿔지게 되지요. 물론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체제가 각기 그 본질적 요구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지만요.
특히 지금까지 장흐 평가해오던 상대방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 어느 부분이 진실이고 그릇된 것이었나 하는 것을 자각하게 될 겁니다.
차=북쪽에서도 적십자회담에 응하는 것은 군사적·정치적 면에서 개방하여 사람들이 왕래해도 괜찮다는 생각에서 한 것이겠지요. 물론 개방·교섭이 불가피했던 사정도 있었겠는데 이 「불가피서이」과 「자신감」을 신중히 고려해봐야 할 것 같아요.
신=그렇습니다. 개방사회와 달라 폐쇄사회가 자본주의를 향해서 조그만 구멍이나마 뚫어준 것은 어느 면에서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 용기를 뒷받침 할 수 있는 무엇이 있지 않겠느냐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차=경제적인 면에서도 그들이 개방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겁니다. 북한이 공업화를 이룩했다지만 이젠 시설노후화로 인한 근대적 시설 도입에 큰 애로를 겪고 있고 경영관리면에서도 선진기술을 도입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신=다음은 서울회담에 관해선데…. 될수록 많은 사람이 와서 골고루 보고 돌아가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화해 「무드」에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난번 평양방문 때 「매스컴」을 완전 개방했듯이 진실을 그대로 보도해달라고 꼭 부탁하고 싶습니다.

<여길 숨김없이 보여줘야>
그리고 앞으론 기자들이라도 몇십명씩만 왕래할게 아니라 이왕이면 남북기자전부가 왕래하면서 서로 눈으로 보았으면 좋겠어요.
차=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면서 회담하는 본의도가 진실보도에 있는 것 아닙니까. 현재로선 중공보다 횔씬 폐쇄적인 북한사회로서는 개방이 사실상 힘들겠으나 자주 왕래함으로써 이러한 「무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봅니다.
신=북적관계자들이 개방사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표면상의 무질서를 우리 나라 실정인 양 알고 돌아갈 우려가 있읍니다. 「브례즈네프」나 주은래는 미국사회가 무질서하지만, 그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질서와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북한공산주의설는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일뿐 아니라 자본주의나 자유사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곳을 골고루 보아 전쟁에 대한 망상도 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여기서도 숨김없이 보여주어야 합니다. 판자촌도 있고 깡패도 있습니다. 경제성장도 있었습니다. 이 「다양」속에 힘이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은 이번에도 모든 것 다 제쳐놓고라도 정당·사회단체대표의 연설을 듣자는 태도였듯이 일방적인 정치공세로 몰고 가려는 인상이었지요.
북에서 온 뉴스 본질캐야 7·4성명의 3대 원칙도 그렇습니다.
평화통일·자주통일·민족대단결이라는 것이 우리의 안보를 약화시키기 위한 「평화」, 미군철수를 위한 「자주」, 자유를 바탕으로 한 정신무장의 해제를 위한 「민족」단결일수 없기 때문에 그런 뒷 계산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차=북한은 전쟁준비상황을 하나도 안 보여줬지만, 전국토요새학, 전인민무장화라는 그들의 구호로 보아 골목마다 총을 메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보였는데 화면에는 하나도 안보였지요. 그 쪽에서 쏟아져 온 그 쪽의 뉴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우리의 자세가 중요해요. 갔던 사람들은 미리 다 알고 간 것이지만 북한실점에 어두운 일반국민들의 자세 말입니다.
신문·「라디오」·「텔레비젼」을 보는 사람들이 비간의식을 가져야겠지요.
이번 보도를 통해 본 일반의 반응은 누구든지 「단조롭다」는 인상이었던 것 같아요. 「일사불란」이라는 단조성과 그 본질을 알아야 우리체제의 장점이 무엇이라는 것이 뚜렷이 부각되겠지요.

<결정적「모먼트」 있어야>
신=미·소가 평화공존을 하겠다고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한 것이 58년이지요. 「후루시초프」가 미국에 가고 「닉슨」」이 소련에 가고 하면서 미·소간 해수의 징조가 그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번 회담이 그 정도의 효과는 있었다고 볼 수 있지요. 정치적인 대표는 왕래하지 않았지만「매스·미디어」룰 통해서 말입니다.
미·소간에는 결정적인 평화공존이 이룩된 62년까지 교류시작부터 5년을 끌었습니다. 그것도 「쿠바」사태라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아서지요.
남북간에도 교류는 텄지만 도저히 싸워서는 안되겠다는 결정적인 「모멘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도대체 남북회담이 휴전 후 27여년이 지난 이제 와서야 시작됐다는 것은 창피스럽기도 합니다. 봉화란 모든 대립을 종결시키는 한 방법이 아닙니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