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61) 전시하의 정치파동(1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압력단체의 기승>(1)
52년2월5일 국회의원보궐선거가 끝난 후 이 대통령이 『국회의원이 민의를 깨닫지 못한다면 유권자는 국회의원을 소환할 것이다』라는 담화를 발표하자 부산시내에서 국회의원소환 벽보와 함께 땃벌떼·백골단 등의 정치압력단체들이 이른바 민의란 이름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더욱이 『혹은 말하기를 국회의원소환조항이 헌법에 없다고 하나 소환하지 말라는 조항도 없으므로 민주국가의 주인 되는 투표자들이 자기대표를 소환하는 것은 법리로도 정당하다』는 이 박사의 야릇한 유권적 해석으로 이들 정치적 압력분자들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다.
2월18일에는 2천여 명의 군중이 바로 국회 앞에서 국회의원 소환「데모」를 벌였고 국회에 불려온 관계장관은 이들을 처벌할 근거가 없다는 방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비상계엄 하 연일 군중 「데모」>
4월17일 원내야당세력에 의해 내각책임제개헌안이 제출된 데 이어 순천에서 서민호 의원이 서창선 대위를 사살한 사건이 벌어지자 곽상훈 오위영 엄상섭 정헌주 서범석 의원 등 내각책임제 개헌공작에 앞장선 야당의원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벽보와 함께 서민호 의원을 구속 엄단하라는 「비라」가 하루에도 수천 장씩 나돌았다.
여기에 원외자유당일색인 각지방의회는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여 하루에도 수백 통씩 정부에 보내는가 하면 각지방 의회대표들이 수백 명씩 부산에 몰려와 국회해산을 요구하며 연일「데모」를 벌였다.
5월19일 충무로 광장에는 반민족국회의원성토대회란 주최자 측 없는 군중대회가 열렸다 .원외자유당 간부인 김장민 곽흥구 원창남씨 등이 연사로 나선 이 대회에는 엉뚱하게도 조방 여직공 3백여 명이 동원되었고 단속한다고 경찰관 5백여 명이 동원됐으나 이들도 여직공들과 함께 대회를 참관했다.
비상계엄령 선포로 모든 집회는 금지됐는데도 국회성토「데모」는 연일 부산시내를 누볐다.
6월에 들어서자 지방의회대표 1천여 명은 국회가 해산할 때까지 단식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연일 대통령관저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었고 민중자결단·땃벌떼·백골단 등의 폭력배는 야당인사들에 대해 온갖 위협을 가하였다.
요는 이미 국회에 제출된 내각책임제개헌안을 철회시키기 위해 원외로부터 무자비한 압력을 가한 것이다.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관제민의 발동으로 원내의 야당교두보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의 야당 관계자의 증언.
▲한건수씨(당시 원내자유당 창당주비위원·6, 7, 8대 의원·현 신민당 원내부총무·52) <원내자유당은 국제구락부에서 대의원대회를 열고 개헌안 문제를 논의했어요. 2백여 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대의원대회에서 내가 개헌안제안 설명을 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켜달라고 말하고 연단을 내려오는데 느닷없이 괴한들이 들이닥치더니 나와 장대희씨 등의 이름을 부르며 『잡아라』고 고함칩디다. 괴한들은 권총을 빼들고 내 뒷덜미를 잡아요.
도망가는 나를 막 쏘려는 것을 김용우 의원이 막고 나를 대기시켜둔 「지프」에 태워 그의 집에 숨겨줍디다.
다시 오위영 의원 집에가 며칠 숨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거리에는 나를 역도 98인의 한사람이라고 욕하는 벽보가 나붙고 괴한들이 미행합디다. 하루는 내가 숨어있는 보수동 집에 괴한이 습격해와 뒷문으로 도망쳐 옆집 벽장 안에 숨기도 했어요. 나는 집에 있을 수 없어서 처가로 인척이 되는 어느 검사 집에 갔더니 부인이 식모방 다락에 감추어줍디다. 그런데 남편 되는 검사는 몰랐던 모양이에요. 공직에 있는 남편 몰래 수배하고있는 나를 감추어 주다보니 그 부인 얼굴이 매일 수척해 가는 것 같아서 며칠 있다 하는 수 없이 유승선이란 친구 집에 갔는데 그들 부부는 방바닥에 자고 나에겐 침대를 주더군요.>

<국회자진해산결의안을 제출>
이 같이 어수선한 가운데 김성수 부통령이 임기를 얼마 앞둔 5월29일 국회에 사표를 내고 이승만 정부하의 부통령에 앉아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해 여야대립에 더욱 불을 질렀다.
한국정세가 이렇게 혼란해지자 「유엔」한국위는 이 대통령을 방문하고 민주절차를 존중할 것을 제의했고 「트루먼」 미국대통령도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에 군사원조를 하고있다는 각서를 전달했다.
영·호·불 등의 우방정부가 여기에 동조했고, 「유엔」 사무총장도 「유엔」 한위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원외자유당은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민의를 무시하고 외세에 의존 하려한다고 비난하면서 민의에 따라 국회는 해산해야한다고 주장, 국회자진해산결의안을 본회의에 제출했다.
이에 대한 관계자의 이야기.
▲이활씨(당시 원외자유당총무·전 국민회 회장·현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 회장·62) <당시 폭력배의 배후에는 이 박사를 지지한다는 각 단체가 꽤 작용했지만 국회해산과 소환운동에는 장택상 총리의 입김이 많이 쐬었고 그런 정치압력단체 주동인물에는 이른바 족청파가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뚜렷한 단체이름을 내걸지 않았기 때문에 이 박사 지지를 위한 압력단체라면 덮어놓고 국민회가 관계했다고 욕을 먹었지요.
당시 정치「메모」대들은 어느 단체의 이름아래 행동한 게 아니고 과잉충성에서 각자 행동했기 때문에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나 자신은 이 박사 측근들이 야당세력의 국회의원을 잡아넣자고 했을 때 반대했어요. 그 방법보다는 원외자유당을 중심한 이 박사 지지의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자폭하는 방법을 강구하면 폭력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고 주장했지요. 말하자면 국회자율해산을 결의하라는 것이었지요.>
한편 이갑성 양은희 박승출 의원 등 원외자유당 60명의 서명으로 6월28일 국회에 제출된 국회자율해산결의안의 제안이유는 이러했다.

<의사당 안에서 국회의원구타>
①서민호 의원 사건과 국체의 변혁을 기도한 의원사건은 그 중대성에 비추어 사직당국에 일임해야 함에도 헌법 49조를 남용하여 석방 결의해 국민의 분노를 발동케 했다. ②적의 준동으로 혼란해진 치안유지를 위해 선포한 계엄선포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③내정을 간섭하는 「유엔」한위의 성명의 진상을 외무장관에 청취하자는 동의를 묵살한 것은 외세의존의 사대주의의 심산이다. ④대통령선거·헌법개정안 등 중대안건을 놓고도 「의원의 성원미달로 유회하는 것은」 국회의 기능을 상실케 한 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내놓은 이 결의안은 법률적인 문제가 있다하여 일단 보류됐다.
이 결의안이 제출된 날 국회입구에는 민중자결단원이란 청년 수백 명이 막고 서서 국회자진해산결의안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못나간다고 의원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산회 후에도 의원들은 의사당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도로 들어가야만 했는데 이날 박성하 의원은 의사당 안에서 방청객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얻어맞는 사건도 일어났다.
대통령관저 앞에서 가마니를 깔고 국회해산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을 하던 1천여 명의 지방의원들은 윤재관씨 등 1백30명의 대표이름으로 이 박사에게 6월30일 하오 5시까지 국회를 해산하고 즉시 총선거를 실시할 것과 만약 이 요구가 관철 안되면 국회에 돌입하여 실력으로 민의를 수호하겠다는 건의서를 전달하고 실력행사를 위해 실탄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 같은 『민의』를 존중해서인지 이 박사는 6월30일 l2회 국회폐회식에 보낸 치사에서 드디어 정부개헌안을 통과시키든가 국회가 해산하든 가 양자택일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장택상 총리가 대독한 이 대통령의 치사요지는 이러했다.

<이 대통령의 대 국회 최후통첩>
『민국의 안위가 절박한 시기에 정치상파당으로 다소 문제가 곤란케 된 것은 일반이 다 함께 통탄하는 바이다. 논쟁의 요점은 대통령직선과 양원제에 대한 개헌인데 이것이 전 민족의 동일한 요구이므로 이것만 국회에서 통과되면 다른 것은 차차 해결을 볼 것이므로 각 도·읍·면 의원들에게 당분간 기다려 달라고 요청한 것이 벌써 1주 이상 지났다. 그러나 아직 개헌안 통과를 못보고 민중대표는 대통령에게 국회해산을 요구해 민심은 날로 격앙하고 반대분자는 민심을 선동하고있어 위험이 크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민의에 따라 해산함이 대통령의 직책으로 생각한다. 이를 수일 안에 공포할 생각이니 국회의원 여러분은 이 정부안을 통과시켜 전화위복하기 바란다.』
이날 폐회식에 참석한 「무쵸」 주한미대사를 비롯하여 불대사, 영국의 대리공사, 「유엔」한위 대모 등은 이박사의 치사를 듣고 모두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협상의 시기가 지났음을 안 국회는 국회가 해산되거나 어떤 변란이 일어나면 더욱 중대한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는 견해에 의견을 모으고 신라회에서 내놓은 세칭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고 이박사에게 굴복하게 되었다.
◇주요일지(1952년 3월 4·5·6·7일)
※4일 ▲북한상공서 공중전계속, 적기 1대 격추 ▲중공, 미군의 세균전으로 북한에 전염병 퍼졌다고 비난 ▲「애치슨」 국무, 공산측의 세균전 비난을 일축
※5일 ▲적 「미그」기 5대 격추 ▲서남지구에서 2백83명의 공비사살 ▲법무장관에 서상관씨 임명
※6일 ▲공산군 맹렬한 포격 ▲휴전회남 계속교착 ▲농림장관에 함인변씨 임명 ▲불군, 호군과의 격전 계속
※7일 ▲북평방송, 미군의 세균전전개를 계속 비난 ▲「유엔」 군사령부는 북평방송 공박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