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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 <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박사-경무대 사계 여록 (159)|윤치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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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거족적 환영>
이 박사의 환국이 거족적 환영을 받은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영도자인 동시에 국제적으로 알려진 정치가였다. 이 박사에 대한 기대는 우리 국민만이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이야말로 이 박사를 한국 독립의 지도자로 생각했고 군정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
내가 이 박사의 전화를 받은 것은 10월16일이었다. 그는 미 국무성과 「맥아더」 원수, 「하지」 사령관 외에는 연락 없이 환국했었다. 내가 조선호텔에 달려갔을 때에는 한 사람도 우리측 사람이 없었고 「하지」 중장 등 미군 장병들뿐이었다. 그와 나는 반가움을 억제하지 못하고 소리내어 울며 얼싸 안았다. 그는 내가 흥업 구락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일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만나자마자 『다리는 성하냐? 어깨가 깨어졌다고 들었다』면서 감정에 복받친 것도 그 때문이다.
흥업 구락부 사건은 직접 이 박사와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잡혀 들어간 일경의 구실은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구미 위원부와 동지회 활동을 했다는 것과 흥업이 이 박사와 연락을 하는 조직체라는 판단에서였다. 흥업구는 윤치호씨와 이상재 씨가 세운 것으로 YMCA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는 전국의 유명 종교인을 위시해서 뜻 있는 사람들이 집결했었다. 그야말로 민족주의의 최후 세력이 뜻을 모은 단체였다.
총독부에서도 맨 먼저 나를 잡아들여 갔었다. 윤치호씨가 회장으로서 책임이 있었으나 그는 1백5인 사건으로 10년의 옥고를 치렀었고, 윤치호씨의 구속이 국제 여론화했기 때문에 다시 잡아들이지 못하고 귀국한지 얼마 안 되는 나를 구금한 것이다. 나의 구속 문제는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문제화되어서 당시의 국내 부차관 관옥정삼낭과 동경 시장을 지냈던 판곡 남작까지 서울에와 남 총독을 충고하고 갔었다. 나는 형무소에서 조선 「호텔」로 불려가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기도 했다.
결국 나는 그후 7개월을 더 갇혀 있다가 6년 징역에 집행유예로 나왔다. 출옥 후 병상에 있을 때 민세 안재홍이 찾아와 하던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는 나에게 몽양 (여운형)과 같이 장개석 주석을 찾아가 일본과의 화해를 도모해 보자는 것이었다. 몽양은 이미 승낙한 것 같았다. 나는 즉석에서 『이 사람 정신이 있어』라고 충고해 주었다. 나는 이 박사와 박용만씨의 정세 판단이 엇갈렸던 일이 생각났다. 박용만씨도 이와 비슷한 유혹에 걸렸기 때문에 의혈단의 총을 맞은 것이다. 후일에 민세는 큰일 날 뻔했다면서 총독부의 청탁이었다는 것을 고백했다.
이 박사는 조선 「호텔」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가 할 일은 국민의 환영에 답하는 환국 성명이었다. 그는 성명 문제를 의논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민족 대동 단결의 지론은 그의 광복 투쟁의 기본 철학이었다. 나는 그의 성명을 통해서 현실적인 뼈대를 제시해야한다고 믿었다. 우리가 국외에서 광복 활동을 했다고 해서 국내의 피나는 고층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국권이 일제에 있는 이상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국민의 생존 현실이었건만 해방에 들뜬 분위기에서는 인정되지 않았었다. 이 박사는 그러한 나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했다. 그래서 그와 나는 『단 한 사람만 민족을 등진 사람으로 단죄되어야한다』는 말을 성명에 포함시켰다. 이 박사는 일제의 질곡에 고생한 동포가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으나 나의 입장은 이것이 건국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공산 진영은 소위 친일파에 대한 대중적인 증오감을 선동하고 있어 이에 쐐기를 박아야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정당 사회 단체는 우후죽순처럼 하루사이에 10여 개씩 나타났다. 임정에서는 아직 환국의 소식이 없었다. 이 박사는 물론 송진우씨와 나는 임정이 돌아올 때까지 정치 활동을 삼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해도 이 박사에게 국내 정세를 설명해줄 필요도 있고 해서 송진우 김성수 김준연 장덕수 김도연 윤보선 허정 임영신 정인보 유자후 백관수 등의 명단과 윤치호 최린 이광수 등을 괄호 속에 넣어 20여명을 적어 이 박사에게 제시했다. 이 박사가 한국 민주당과 가까이하게 된 것은 이 명단이 인연이 아닌가 한다. 조병옥은 군정의 경찰 일을 보고 있어서 오지를 않았지만 장택상은 이따금 드나들었다.
이 박사를 둘러싼 건국 전후의 정치 세력은 대체로 세「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김성수씨 등 한국 민주당과 여운형 박헌영 이강국 허헌 등의 인민 공화파, 그리고 후에 들어온 한국 독립당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가장 치열하게 이 박사에 대한 유인 작전을 편 것은 인민 공화파였다. 그들은 경기 여중 (현 창덕여고)의 강당에서 소위 전국 대표 회의라는 모임을 갖고 민주주의 민족 전선 (남노당)이라는 걸 선포, 이 박사를 주석으로 결정하고 그들이 실권의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이들 대표의 이 박사 면담 요청을 문전에서 거절했으나 이들은 신문에 「이 박사와 면담」이라는 허위 보도를 내게까지 했다. 그들은 끝내는 나를 납치했다. 나중 이것을 안 이 박사는 그들 대표를 불러 꾸짖었다. 임시 정부가 뚜렷이 있는데 어찌 경박하게 파당을 만들어서 두느냐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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