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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제자 윤석오>|<제26화> 내가 아는 이 박사-경무대 사계 여록 (144)|손영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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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피난 수도 부산에서도 이 박사는 이따금 낚시질을 나갔었다. 이 박사의 낚시는 건강 관리라거나 도락으로서가 아니라 낚시를 담그고 앉아 중요한 구상을 하는 때가 더 많다고 들었다. 아뭏든 임시 관저는 좁고 옹색했으니까 이런 답답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자주 낚시질을 나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산의 여름 날씨는 폭우가 쏟아지다가도 씻은 듯이 개는 때가 더러 있다.
근해 여름 어느 날도 여름비가 쏟아지다 갠 직후였다. 이 박사는 비서 한사람만을 데리고 몰래 부산시내 사하동의 낙동강변에 있는 저수지로 낚시질을 떠났던 모양이다. 그런데 가는 도중 한 농부가 길가의 밭에 인분뇨를 뿌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박사는 자동차를 세우고 수행한 비서더러 농부를 불러오도록 했다. 이 박사는 농부에게 『왜 비료를 쓰지 않고 냄새 나는 인분뇨를 뿌리느냐』고 물으면서 『인분을 뿌리면 악취도 풍길 뿐 아니라 도시 위생에도 문제가 생긴다』고 타일렀다.
그러나 이 백발의 노인이 대통령인줄을 전연 눈치채지 못한 농부는 『인조 비료는 관리들이 다 먹어 버리고 우리 같은 촌놈에게 어디 돌아옵니까, 사정 모르는 소리 마이소』라고 별스런 노인도 다 보겠다는 투로 말하곤 그대로 일을 계속했다.
『관리들이 다 먹어버린다니…』 이 박사는 이 농부의 태도보다 이 농부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낚시질도 잡치고 몹시 화가 났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시청에 나갔더니 경남도지사 양성봉과 부산시장은 즉시 임시 관저로 들어오라는 지시였다. 도무지 없던 뜻밖의 지시다. 초조해서 비서실에 알아봤더니 낚시질 가다 일어난 일을 얘기해 주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관저로 가 이 박사 앞에 양 지사와 나란히 섰다.
이 박사는 『도시 근교의 농부들마저 비료가 없어 인분을 뿌리고 있다』면서 『관리들이 비료를 가로채 버린다는데 어떻게 된게야』라고 힐책하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양 지사는 『도에서는 비료를 전부 배급해 주었읍니다』라고 대답해 현장을 모면하려 했지만 통할 리가 없었다.
나는 아차 싶어 『말단 행정에서 불찰이 있는 모양인데 즉각 조사 처리하고 보고를 올리겠읍니다』고 솔직이 잘못을 시인해서 그럭저럭 진땀나는 자리를 모면하고 나왔다.
나는 나오는 길로 사하면 주재 출장 소장을 불러 조사해 봤더니 비료는 도청 창고 안에 잠자고 있다는 얘기였다.
전시 중에 있었던 늑장 행정이 호되게 당한 표본이라고 할까. 어떻든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도시의 인분 처리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대통령의 임시 관저는 경남도청 뒤에 자리잡은 지사 관저였는데 그곳은 다소 비탈진 길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 이 부근 집들의 분뇨 수거를 가던 인부들이 비탈길에 미끄러져 수레가 넘어지는 바람에 분뇨를 길에 쏟아버렸다는 것이었다.
한밤중 집에서 이런 전화 보고를 받고 나는 황급히 부산 경찰서장에게 연락해 소방차를 동원해서 한밤의 청소를 서둘러 한 일이 있다.
이런 것도 모두 피난 수도였기 때문에 겪어야했던 일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또 하나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일 중의 하나는 부산 국제 시장 대화 사건 복구 후 이 대통령이 시장을 시찰했을 때의 일이다.
대 화재 자체는 불행한 손실이었지만 불탄 뒤의 복구는 지저분하던 「바라크」촌 시장이 그런대로 짜임새 있는 새 건물로 시장의 모습을 갖췄고 전시답지 않게 화사한 상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이 박사는 양 지사와 나를 데리고 상가를 시찰하다 잘 정돈되어 진열된 상품들을 살피더니 『저게 모두 국산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네-대부분 모두 국산이올시다』 내가 대답에 멈칫하고 있는 사이 양 지사가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시장 대표들도 대통령의 시찰을 지켜보고 있는데 지사의 이 서슴없는 거짓 보고에 나는 몹시 당황했고 한편으론 아주 불쾌했다.
그래서 나는 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아닙니다. 대부분 외래품이올시다. 아직 국산으로 이렇게 갖춰 놓을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라고 했더니 이 박사의 얼굴엔 다소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는 듯 했다.
이 박사는 잠시 후에 나를 보고 상인들을 모으라고 일렀다.
서둘러 상인들을 시장 사무실에 모았더니 이 박사는 『전쟁을 겪어 우리 산업이 더욱 황폐해 있고 그 때문에 일부 생산되는 상품이 외래품에 비해 질은 낮겠지만 국가를 위해 상인들은 국산품을 아끼고 키워갈 줄 알아야한다. 다소 어려운 점이 있더라도 국산품이 있는 종류는 외래품을 사들여 놓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이 박사가 이런 연설을 하고 있는 동안 양 지사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나는 다소간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언제나 관리들은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또 자기 자리를 오래 지탱하기 위해 상부에 대해 곧잘 거짓말을 하고 모두 잘 돼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자 병폐라는 생각이 지금도 들기 때문이다.

<계속>

<부산 피난 시절 이 박사의 일화 몇가지를 소개하기 위해 민의원을 지낸 손영수씨가 부산 시장을 지내던 때의 회고를 2회에 한해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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