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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찾기」…대화 모색 3백42일|남북적 본 회담 앞으로 보름…그 예비 회담 발자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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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남북적십자 본 회담이 오는 8월5일 드디어 그 막을 올리게 됐다.
분단 4반세기만에 7·4 남북 공동 성명과 함께 길고도 먼 대화의 길은 본격화되었다.
앞으로 보름 남짓-. 준비 절차 협의가 한두 차례 남았지만 갈라진 핏줄을 이으러 출범할 여망의 돛대는 벌써부터 부풀기만 하다.
본 회담은 작년 8월12일 최두선 한적 총재가 『이산가족 찾기 사업』을 제의한지 꼭 1주일이 모자라는 1년만에 (3백59일) 그 빛을 보게됐다. 19일 제23차 예비 회담에서의 타결은 3백42일만이었다.
그 동안 남북 양측은 준비 접촉 5차례, 예비 회담 23차례, 실무회의 13차례 등 모두 41번의 대좌를 가지고 의견 조정을 서둘러왔다.
4반세기만의 대화는 사실 이견과 교착의 험로로 이어진 것이었다.
작업은 처음 서울∼평양간을 오가는 본 회담 장소 문제를 두 번 만에 (2, 3차) 처리, 순조로울 듯이 보였다. 그러나 다음 의제에서부터 먹구름이 일기 시작, 일시 문제는 네 차례나 회담 (3∼6차)을 가졌으나 입씨름만 되풀이하고 보류, 첫 설패작을 냈으며 특히 의제 문제는 14차례 (6∼19차)나 끌고도 결말을 못 본 난공사였다.
이 때문에 회담은 공개 원칙을 깨고 비공개 실무회의를 13차례나 가져야 했다. 7개월20일 동안을 엇 비슷한 안을 놓고 입씨름만을 벌였다.
이 바람에 양측은 전후 7, 8번의 수정안을 내는 진통을 치렀다.
회의 간격도 평균 1주일이던 것이 8차 실무회의 때는 최고로 24일만에 열려 심각의 도를 깊게 하기도 했다. 회의도 일시 문제를 토의한 4차 예비 회담 때는 장장 3시간5분의 설전을 벌인 반면 실무회의 직전인 19차 회담은 보통보다 1시간이 짧은 50분만에 끝나는 등 「지그재그」로 얼룩진 것이었다. 한말로 곡예 1년이었다.
회의는 7·4 공동 성명 뒤 간신이 제 궤도에 올랐다.
본 회담 날짜를 찍은 23차 예비 회담은 본 회담 대표단 구성 문제를 17분만에 매듭짓고 휴회에 들어갔다가 예비 회담의 마지막 의제인 기타 진행 절차 등 부수적인 문제에 관해 쌍방이 크게 상치되는 점이 없는 내용을 각기 문서로 제시했다. 한적 측은 10개항, 북적측은 17개항을 내놓았다. ①회담의 공개 여부와 ②주최측이 방문자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점과 ②적십자 표지와 ④장비와 휴대품의 자유로운 반출입 ⑤통신 교통의 보장 ⑥한 회기를 1주 이내로 한다는 일정 등에 관해서는 다소의 표현 솜씨는 다르지만 대체로 합의된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방문자의 회담장 밖에서의 활동 문제에 있어 한적은 『자유로운 활동 보장』을 내세운데 비해 북적은 주최자가 방문자에게 『회담장 이외의 지역에 대한 참관을 조직할 수 있다』라는 표현으로 자유로운 활동을 제한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냈고 방문자의 신변 보장에 있어 한적은 인적 사항과 사진을 교환, 대조하는 방법을 택한데 대해 북적은 쌍방이 신변상·활동상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의견 차이는 극적인 효과가 많은 1차 본 회담 장소를 어디로 정하느냐는 문제만큼 신경이 쓰이는 것들은 아니다. 쌍방이 각기 26주년 8·15 광복절에 맞춰 회담의 호스트를 맡으려고 벼르고 있기 때문에 1차 회담을 얻느냐 8·15 때 주인 노릇을 맡느냐는 선택의 갈림길에 볼 땐 장소 문제는 쉽게 타결될 전망도 없진 않다.

<최규장·김형구 기자>

<남북적 예비 회담 일지>
「8·12 성명」에서 지난 19일 본회담 개최 일시 합의까지의 남북 일지를 보면-.
▲71넌8월12일 최두선 한적 총재, 이산가족 찾기 남북적 회담 제의.
▲8월14일 북적 수락.
▲8월20일 판문점서 남북적 1차 접촉. 제의·수락 문서 교환.
▲8월26일 2차 접촉. 한적, 9월28일 첫 예비 회담 개최 제의 문서 수교.
▲8월30일 3차 접촉. 북적서 수정 제의 (9월20일) 문서 수령.
▲9월1일 한적 회담 사무국 개관.
▲9월3일 4차 접촉. 9월20일 첫 예비 회담 수락 문서 수교.
▲9월16일 5차 접촉 쌍방 대표 명단 교환.
▲9월20일 1차 예비 회담 개최. 회의 절차 논의.
▲9월22일 남북 직통 전화 개통 (자유의 집∼판문각). 상설 연락 사무소 설치.
▲9월29일 2차 회담. 의제 채택 (본 회담의 장소·일시 의제. 대표단 구성·의사 진행 절차). 첫 공동 휴식
▲10월6일 3차 회담. 한적 제의인 본 회담 서울∼평양 교대 개최 합의. 한적, 장소 결정에 따른 8개항 추가 의제 제출. 본 회담 일시 토의 시작. 북한 경비병 휴게소서 공동 휴식.
▲10월13일 4차 회담. 북적 「12월10일」, 한적 「추후 토의」로 대립. 회담장서 맥주를 들며 약식 휴식.
▲10월20일 5차 회담. 교착. 북적 주최 오찬회.
▲10월27일 6차 회담. 일시 문제 보류. 본 회담 의제 토의 시작. 쌍방 의제 제시 (한적 5개항·북적 3개항)
▲11월3일 7차 회담. 의제 토의. 사업 대상·범위 싸고 벽두부터 대립 (한적=가족 우선·생사 소재 확인 선행. 북적=친척·친우 포함, 자유 내왕 선행 주장). 한적 주최 오찬회.
▲11월11일 8차 회담. 의제로 팽팽한 대립.
▲11월19일 9차 회담. 한적, 가족 범위 확대. 북적, 한적 부총재 등 오찬 초대.
▲11월24일 10차 회담 여전 대립. 한적, 오찬 초대 사양.
▲12월3일 11차 회담. 한적, 천척 포함 수락.
▲12월10일 12차 회담. 북적 수정안. 대상 중 친우·사업 중 재회 삭제. 대상 문제 타결.
▲12월17일 13차 회담. 사업 내용 중점 토의 시작. 한적 「상호 방문」, 북적 「자유 내 왕」싸고 대치.
▲72년1월10일 14차 회담. 대립 여전. 새해 축하 다과회.
▲1월19일 15차 회담. 교착 상태. 한적, 재회 포함도 주장.
▲1월28일 16차 회담. 각기 수정 안내기로.
▲2월3일 17차 회담. 쌍방 수정안. 한적 「상호 방문 위한 자유 왕래」로, 북적 「자유방문」으로 수정. 왕래 문제 사실상 접근. 재회 문제만 남아.
▲2월10일 18차 회담. 서로 자측 안 고집. 공동 휴식.
▲2월17일 19차 회담. 의제 절충 비공개 실무회의 갖기로. 공동 휴식.
▲2월18일 실무회의 구성.
▲2월2l일 첫 실무회의 개최. (24일 2차, 28일 3차, 3월6일 4차, 10일 5차, 17일 6차, 24일 7차, 4월17일 8차, 5월9일 9차, 12일 10차, 19일 11차, 22일 12차)
▲6월5일 13차 실무회의. 의제 타결.
▲6월16일 20차 예비 회담 전체 회의. 의제 합의 문서 교환. (ⓛ주소·생사 확인 ②자유 방문·자유 상봉 ③서신 거래 ④재결합 ⑤기타 인도적으로 해결할 문제 등 5항) 공동 휴식.
▲7월10일 21차 회담. 본 회담 대표단 구성 토의. 쌍방 7명씩 합의.
▲7월l4일 22차 회담. 수석 대표 (단장) 자격을 쌍방 적십자 정·부 책임자로 결정.
▲7월19일 23차 회담. 수행원 70명 내외·7명 이내 자문 위원별도 대동할 수 있음에 합의. 대표단 구성 매듭. 첫 본 회담 8월5일 개최 합의 (북적 제안). 마지막 의제인 기타 진행 절차 토의에 들어가 양측 안을 제시 (한적 10항·북적 17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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