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유격전(20)|민간유격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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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25전쟁 중 적지가 된 여러 지방에서는 애향심과 적개심에 불타는 지방유지들과 청년들이 공산군이나 그 기관을 기습하는 등 산발적인「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은「유엔」군과 경찰이 모두 후퇴한 후 군의 명령이나 지원 없이 오직 반공일념에서 거의 적수공권으로 적과 대항해 싸웠다.
6·25발발직후 적치 하로 들어간 강화도에서는 공산군의 탄압이 가중되자 지방유지들과 반공애국청년들이 대한정의 단을 결성하고 김포∼강화간의 해로차단작전을 전개한 후 섬 안에 주둔중인 공산군과 대전하였다.
9·28 수복 때도 강화도는「유엔」군이나 경찰이 진주하기 이전에 대한정의 단을 중심으로 한 군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태극기를 꽂았다.

<혈서로 결사적 반공투쟁 맹 서>
한편 6·25전부터 지하에 숨어 반공투쟁을 벌이던 평양의 한-중 반공애국청년단원들은 소련군과 북한공산군들을 기습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해 무장한 후 서 평양 내무 서를 습격하는 등 대담한 유격전을 전개했다. 반공이념에 투철했던 이 한-중 반공애국청년단안의 중국인화교출신 청년들은「유엔」군이 북진하자 국군 제1사단과 접촉, 중국인 수색대를 편성해서 중공군을 생포하고 포로심문을 담당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
이밖에도 남북한 각 지역에서 지방유지들을 중심으로 뭉친 반공청년과 학생들이 몽둥이와 도끼 등을 들고 산발적인「게릴라」전을 벌여 적을 괴롭힌 예는 허다했었다.
▲최동석씨(당시 강화도대한정의단장·현 감사원 2국3과 근무·50) <6·25가 발발해 우리강화도 섬 마을에 공산군이 들어와 온갖 만행을 자행하자 8월20일에 나와 홍재룡(당시 강화군수)·김훈태·김대용·조성실 등 5명은 동지들을 규합, 대한정의 단을 결성했습니다.
단원 66명은 모두T 혈서를 써 결사적인 반공투쟁을 전개키로 맹 서하고 제1차로「어선 깨뜨리기 작전」에 들어갔어요.
우선 어선을 타고 김포∼강화간을 왕래하는 공산군들의 해로교통을 봉쇄한 후 강화도에 주둔중인 3백여 명의 적 정규군을 섬멸시킬 계획이었던 겁니다.
우리단원들은 야음을 이용해 도끼로 배 밑창을 깨뜨려 적들이 징발해서 쓰고 있는 강화도근해의 어선 40여 척을 차례로 파괴했습니다.
공산군과의 전투는 무기가 없어 단념하고 말았어요.
10월2일 김포 통진 중학까지 진격해 들어온 우리해병대에 연락 원을 보내 강화도진격을 간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어요.
내가 직접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 해병대한테서 수류탄 3상자와 경기2문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강화도는 우리 손으로 탈환키로 결심하고 작전계획을 세웠습니다. 타격중대·전방 교란부대·후방공작대 등을 편성해 밤 10시쯤 전 대원이 출동, 강화읍내로 들어가 농악을 울리며 국군이 들어온다는 함성을 지르면서 집집마다 태극기를 꽂았어요.
타격중대가 해병대에서 얻어온 수류탄을 터뜨리며 국군의 진격을 위장했더니 당황한 공산군들은 배를 타고 연백으로 도망합디다.
이렇게 해서 강화도는 우리 힘으로 완전히 탈환했어요.
우리는 곧바로 강화경찰서를 장악하고 지하에서 나오는 반공청년학생들을 규합해 대원을 증원했습니다.
주민들은 국군이 안 들어오자 속았다고 우리들한테 항의를 하면서 일부는 공산군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피란 보따리를 꾸려 가지고 떠납디다.

<국군진격 가장 해 밤중에 기습>
그래서 우리는 해병대 16명을 데려다 읍내에서 시위를 벌여 가까스로 민심을 수습했어요.
강화도룰 탈환한 후 우리 정의 단은 치안대로 개편, 대장은 홍재승 씨가 되고 나와 곽노웅 씨가 부대장으로 선출됐습니다.
우리치안대는 해병대에서 80여정의 무기를 얻어 무장을 갖추고 지방공산당원 1천2백여 명을 체포해 경찰에 인계해준 후 11월5일 해체했어요.
l·4후퇴 때에는 대부분의 동지들이 국군과 경 참을 따라 후퇴했지만, 나와 곽노웅씨 등 23명은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섬 안에 흩어져 있는 잔류 반공청년들을 규합, 향토방위특공대를 편성해서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특공대는 1월5일 범선을 타고 건너오는 내무서원 22명과 인민 위 요원 53명을 배가 돛을 내리고 섬 안에 접근하는 순간 일제사격을 가하며 기습해 모두 생포했어요.
다음날에는 월 곶으로 상륙해 오는 공산군 22명을 생포했고요.
1월7일에는 인천형무소에서 석방돼 철 곶으로 건너오는 지방공산당원 1백5명을 모두 생포해 악질당원 60여명은 식량문제도 있고 해서 처치해버렸습니다.
이튿날은 국군장교 3명이 길 상면으로 들어왔다는 연락이 왔어요.
나가 보니 함북 혜산진까지 진격했다가 후퇴대열에서 낙오돼 적진을 뚫고 내려오는 채명신 소령(전 2군사령관·예비역 육군중장)을 비롯한 국군장교들입디다.
채 소령은 1주일동안 우리와 함께 있다가 범선을 타고 충남 당 진으로 내려갔어요.
51년 1월말 우리특공대는 김포에서 건너오는 북한공산군과 혼성인 중공군 제26연대2대대와 4일간에 걸친 혈전을 벌여 4백여 명의 적 병력을 섬멸시켰습니다.
우리대원 3백50여명은「사이렌」과 종소리를 신호로 해서 상륙한 중공군에 일제사격을 가했습니다. 당산으로 후퇴했다가 석신포로 나가 배를 타고 도주하는 패잔병까지 추격해 전멸시켰어요.
1윌30일부터 2월2일까지 벌어진 이 백병전에서는 우리대원 17명도 전사했었어요. 우리 특공대서는 2월 초순 갑곶리로 건너온 김인칙 소령을 비롯한 우리육군첩보대원 l3명을 적으로 오인해 생포하려던 일도 있었어요.
우리특공대는 2월 하순 육군에서 창설한 을지병단에 흡수되면서 그 막을 내렸습니다.
나는 석신포 전투에서 전사한 대원들이 지금까지 원호조치조차 안 돼 그 유족들을 만날 때마다 당시 대장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합니다.>

<중국청년 2백50명 단원으로>
▲위서방씨(당시 평양 한-중 애국반공청년단 중국인단장·현 강릉서 한약방경영·50)<나는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자유중국 군 중령으로 근무하다 부모들을 따라 평양으로 나왔습니다.
1949년 4월 지하에서 반공투쟁을 하던 한국인 10명과 우리 중국인 8명이 주동이 돼 1백50여명의 대원을 포섭, 한-중 애국반공청년단을 조직했어요.
우리단원들은 모두 김일성 대학 근처에 잠복해 야간에 개별적으로 나와 다니는 소련군과 북한공산군장교들을 기습처치하고 권총 13정을 탈취해 1차 적인 무장을 했습니다.
다음에는 평양의 공산군무기창고를 털어다 다발 총·수류탄 등으로 전 단원이 완전 무장을 하고 남는 것은 수수밭에다 감춰놨어요.
6·25발발 당시는 단원이 한국청년 1천여 명, 중국청년 2백50여 명으로 확대돼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산군을 비롯한 악질당원들 여럿을 납치해 다 처치했었어요.
50년8월 중순 우리단원 5명이 서 평양 내무 서를 습격, 서원 8명을 생포해왔어요. 이중 한 명이 도주해서 공산군에 연락하는 바람에 평양에 남아있던 북한공산군「오토바이」부대가 총 출동, 시내를 포위하고 우리들을 토벌합디다. 단원 한 명이 공산군에 잡혔지만, 다리가 부러지는 등의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내 묵비권을 행사해 우리 반공청년단의 정체는 탄로가 안됐어요.
나는 집으로 도망해 숨어 있다가 배추장수를 가장해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평양역 뒤 중국인 집으로 가서 수수밭 속에 파놓은 방공호 속에 숨어있었어요.
10월초 아내가 찾아와 지금 국군이 황해도 신묘까지 진격해왔다는 소식을 들려줍디다.

<백선엽 1사단 찾아와 격려도>
나는 지하에 숨어 있는 단원들에게 모두 연락을 취해「유엔」군이 평양에 진격해 들어오기 3일전부터 완장을 두르고 나와 모란봉 등을 기습, 패주하는 적병들을 섬멸하고 치안을 확보했습니다. 평양에 입성해 우리 얘기를 들은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현 충비 사장)은 정보참모 김안일 중령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직접 나를 찾아왔더군요.
「유엔」군이 진격해 온 후 우리 반공청년단안의 한국인 청년들은 모두 치안대·청년단 등으로 나가고 우리 중국인 청년들 2백50여명은 나와 정계빈(현 자유중국대사관 근무)·강혜림(전사) 동지 등이 중심이 돼「평양화교 반공애국청년보위 단」을 결성해「게릴라」전을 계획하고 있었어요.
우리단원들은 1·4 후퇴가 시작되자 국군들을 따라 후퇴해 나오다 개성에서 부대1사단소속의 중국인수색대를 편성해 휴전 때까지 계속해 싸웠습니다.
이때 수색대로 들어간 단원은 30여명밖에 안됐는데 나머지 단원은 곧「유엔」군이 재 진격하리라고 믿고 내려오는 도중 요소에 모두 배치해놨었어요.
우리 중국인수색대원들은 휴전 때까지 순수한 민간인으로 전선에 나가 중공군들을 많이 생포해왔고 중공군 포로심문에도 많이 협조했습니다. 강혜림 동지는 수원 밑의 고지전투서 전사해 지금 동작 동 국립묘지에 묻혀있습니다. 강 동지가 전사한 이튿날 우리대원들은 복수전을 벌여 적3명을 생포해왔어요.
나는 6·25동란 중의 전공을 인정받아 1957년 대한민국금성무공화랑훈장을 받았습니다.>

<주요일지> (1952 년1월24, 25, 26, 27일)
※1월24일▲한국해군, 미군으로부터 4척의 어뢰정 인수▲「미그」조종사는 중공 인이라고 미 극동공군서 발표 ▲「네팔」에「쿠데타」발생실패
※1월25일▲공산「제트」기 10대 격추 ▲부산시 장정응소율 극히 불량 ▲영-애 군 충돌 사망 45명
※1월26일▲휴전회담, 공산 측은 68명의 억류외국인명단수교▲「리지웨이」사령관, 휴전회담전망을 비관 ▲애 급에 계엄령선포
※1월27일▲B-29, 신 안주 철교 폭격 ▲애 급 정정 긴장
※알림=『유격전』은 이번 회로 끝내고, 다음부터는『전시하의 정치파동』을 다룰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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