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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유격전(18)|안 악 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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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25때 황해도는「유엔」군의 북진으로 공산군이 쫓기면서 자행한 반공인사들에 대한 학살과 또한 이 무렵에 반공청년들의 공산분자들에 대한 처단을 합해 전 도민의 1할 정도가 죽은 이념의 가장 치열한 대립지대였다. 1950년 10월 중순에 일어난 신 천·안 악 지방 청년들의 봉기는 삽시간에 각 지역으로 파급되어 반공애국청년들은 전도 내에서 수많은 공산당원들을 색출처단 하였다.
안악군 일대의 반공청년들은「유엔」군이 진격해 오자 고향을 찾은 국군장교를 통해 얻은 무기와 노획한 적의 각종 화기 등을 가지고 구월산의 잔 비 토벌과 치안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후「유엔」군의 후퇴로 실향의 한을 안고 도서로 나와「게릴라」전을 벌이던 안악 부대는「동키」제10연대가 되면서부터는 피 도를 전진기지로 해서 구월산 동북부 내륙 깊숙이 거점을 확보하고 공산군 토벌대와 10여 일간씩 백병전을 벌이기도 했다.
대원들의 거의가 중-고교 학생들로 편성된 안 악 부대는 서해유격대들 중 유일하게 본부를 내륙에 두고「게릴라」전을 벌인 부대였다.


▲이경남씨(당시 안 악 부대 참모장·현 일요신문 편집국장·43) <지하와 구월산 둥지에 잠복해 있던 우리 안악 지방의 반공청년학생 1백50여명은「유엔」군이 진격해 오기전인 50년 10월14일 봉기를 일으켜 내무 서를 비롯한 공산당 기관들을 습격하고 패잔병과 지방공산당원들을 잡아 처치했습니다.
10월18일「유엔」군이 입성하자 우리청년들은 치안대·특 경대 등을 조직, 구월산 공비소탕작전을 벌이는 한편 공산분자들을 계속 색출 처단했어요.
이 무렵 고향엘 들렀던 윤일균 공군소령(현 서울신문 전무), 이형봉 대위 같은 국군장교들은 미군들이 노획했다 소각시키려는 적 무기들을 많이 얻어다 줘 우리대원들의 무장을 도와줬어요.
1·4후퇴가 시작되자 고향을 사수키로 결의한 우리 안악 지방의 반공청년 3백 여명은 치안대·특 경대·한 청 등을 통합,
안악 지역 방위사령부를 결성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이날 정오 날아온「유엔」군 전투기4대는 안 악 읍을 이미 적지로 간주하고 무차별 폭격하는 바람에 방위사령부는 편성하자마자 와해돼 버리고 말았어요.
나는 재령 쪽으로 정보수집을 나갔다 하오5시쯤 돌아와 보니 특 경 대원 1백50여명만 남아서 피란 민들을 엄호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6시쯤에는 피난민들을 호위하면서 재령을 거쳐 해 주로 후퇴키로 하고 읍내를 떠났습니다.
우리는 12월12일 신천 무장대의 요청으로 신 천 읍으로 올라가 구월산공비들과 접전을 벌였어요. 이때 신 천 읍은 우리 무장 대와 공비사이에서 주인이 3번씩이나 바뀌는 격전지가 됐었지요.
합동 전을 벌이던 우리 안 악 부대와 신 천 부대는 22일 해 주 실함「뉴스」를 듣고 신 천 읍을 떠나 주력은 옹진반도로 후퇴하고 엄영권(자폭)·임명호 동지 등 1백여 명은 구월산으로 잠복했습니다.
우리 안 악 부대는 51년 1월초까지 옹진반도에서 옹 진 청년방위 군, 학도의용군들과 협동해서 일면 방어, 일면 후퇴작전을 전개하다 어화도로 건너갔어요.
이 무렵 옹 진 청방과 신 천 부대 사이에는 서로 무장을 뺏는 등 알력이 좀 있었어요.
우리는 어화도에서 부녀자들과 노령의 피란 민들은 모두 연평도·서산·군산 등지로 남하시켜주고 51년3월「동키」제10연대로 들어갔습니다.
간부진은 김유성씨(실종)가 부대장이 되고 참모장엔 원용서씨(실종), 정보참모는 이아천 동지가, 작전참모는 내가 맡았어요. 간부들은 모두가 대학이나 고교재학중인 20세 내외의 학생들이었었습니다.
대원 2백50명으로 출발한 우리「동키」제10연대는 피도·하취나도를 전초기지로 해서 구월산 오 봉 근처에 본부를 설치하고 해 주-사리 원-재령-신 천에 연하는 작전지역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했어요.
4월 중순에는 김유성 대장의 진두지휘로 구월산 오 봉 골짜기에 부대 CP를 설치하고 대원 1백여 명이 우선 침투해 들어갔습니다.
「동키」사령부는 적지내륙에 CP를 설치한 부대는 우리뿐이라면서 모든 보급을 우선 지원해줍디다.
우리 안악 부대는 구월산에 들어간 후 7번에 걸친 낙하산 투하보급을 받으며 6개월 동안 인근의 내무서·정치보위부 등 적 기관을 기습, 파괴하고 반공인사들을 구출해 내는 등 불이 나게 작전을 전개했어요.
51년 9월에는 이정숙 여 대장과 더불어 구월산부대에 가 있던 안악 출신 대원들이 돌아오고 후퇴당시 구월산으로 들어가 잠복했던 동지들이 규합돼 대원이 3백50여명이 됐어요.
우리는 5월부터 본격적인 작전에 들어가 안악군 은홍면과 용순면, 신천군 용진면 등에 주둔한 공산군 17사단소속 토벌대 3개 대대를 기습, 1백20여명의 적을 사살하고 막사 14개소를 파괴했습니다.
7월15일에는 도서와 구월산간의 아군교류를 막기 위해 설치된 안악군 대행면의 적 해군경비대를 기습했고요.
우리의 구월산내륙 소대와 피 도에 대기중인 중대의 동시협공을 받은 적은 52명이 사살되는 등 문자그대로 섬멸 당했어요. 김정식 특공대는 8월20일 공산군복장으로 안악군 소비조합을 기습, 건물을 완전 소각시키고 물품을 전부 노획해 왔어요.
9월에는 임명호 특공대가 안 악의 적 비행장 자재창고를 기습 폭파했고요. 우리 안 악 부대는 51년 10월24일부터 10일 동안에 증강된 공산군 1개 연대병력의 토별 대와 일대의 결전을 벌였습니다.

<공산군 정치장교도 귀순시켜>
신천군 북부면 책임자로 와 있다가 우리 비밀공작대원의 4촌 누이동생과 연애관계에 빠져있던 공산군정치장교 박무겸 대위를 두 달간에 걸쳐 포섭 귀순시켰는데 이 때 우리는 적의 대 토벌전이 곧 있다는 정보를 얻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어요.
구월산 동부를 완전 포위한 북한공산군 1개 연대와 중공군 l개 대대는 10월24일 하오 마침내 우리부대본부를 공격해옵니다.
이날부터 구월산일대에서는 피 아 간에 숨바꼭질을 거듭하는 혼전이 벌어졌고 북한공산군과 중공군이 서로 오인 코 저희끼리 교전, 1백여 명이 사살되는「난센스」도 일어났습니다.
10일간의 백병전에서 적 3백여 명을 사살했지만 우리부대도 59명이 전사하고 70여명이 실종되는 큰 피해를 입었어요.
생존대원 44명은 초 도의 우리훈련기지로 철수해 월동을 하며 전열을 정비했습니다.
구월산 전투에서 김정식 소대장은 혼자서 적40여명을 사살하는 수훈을 세웠고 김종범 대대장(현 대한종합식품 근무)등의 활약도 아주 컸습니다. 제3대「동키」사령관이었던「무킨」 소령은 우리부대의 재기를 위해 파격적인 지원을 해줬고 월동 중 낙하산훈련을 받았던 20명의 대원들은 김정식 특 공 대장을 필두로 52년5월초 구월산에 투하돼 기지를 구축키, 시작했습니다.

<해·육 협공작전 벌여 40명 사살>
이 무렵 인천에 가서 발동선을 구해 가지고 오던 김유성 대장과 원용서 참모장을 비롯한 대원 17명이 도중에서 조난을 당해 표류하다가 적의 포로가 되는 참사가 일어나 부대간 부진이 개편 됐어요.
겨울동안 적수 중에 있던 구월산에 재침투한 우리 안 악 부대는 52년 5월부터는 1백여 명의 대원이 상주하면서 패섭사에 주둔중인 공산군중대본부를 기습하는 등 작전을 계속했습니다.
7월에는 또 구월산에 들어가 있는 대원과 하취나도에 대기중인 대원들이 동시에 저 도를 기습, 해륙협공작전을 벌여 내무 서를 파괴하고 공산군 40여명을 사살했고요.
53년에 들어서는 구월산과 도서 탈환에 광분한 적들의 강화된 경비 때문에 우리부대는 구월산에는 30여명의 상주대원만을 두고 주력은 하취나도에 주둔하면서 해안침투작전을 벌였어요.
우리 안 악 부대는 3년 동안 대소 2백여 회의 접전을 통해 7백여 명의 적을 사살했고 포섭공작으로 15명을 귀순시켰으며 적 기관·교량 등을 60여 개소나 파괴했지만 우리대원도 1백30여명이 전사하고 50여명이 실종되는 인명피해를 입었습니다.
한편 신 천 출신 반공청년들로 편성됐던「동키」제1연대와「동키」제13연대는 백상도·마합도 등에서「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밖에도 은율군 출신과 송화군 출신들로 편성된 수월 부대(「동키」7)·송 호 부대(「동키」21)등은 초도·석도 등을 방위하면서 황해도해안에서 침투작전을 전개했다.

<소련여자 생포, 미국에 망명케>
▲민 혁 씨(당시 신 천 부대 부대장·현 수자원개발공사 근무·41) <6·25발발과 동시에 구월산으로 잠입했던 우리 신 천 반공청년학생 1천여 명은 50년 10월13일 하산해 일대봉기를 일으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패 주 하는 공산군도 많이 생포했습니다. 이 때 황해도고문관으로 있던 소련여자「루포프엔·리포포」도 우리한테 생포 됐었어요. 이 여자는 포로수용소로 넘어갔다 미국으로 망명, 지금은 미국인과 결혼해 잘 살고 있습니다.
1·4후퇴로 말미암아 옹진 반도를 거쳐 백령도로 들어갔던 우리 신 천 부대 원들은「동키」제1연대·제13연대 등으로 들어가서 휴전 때까지 싸웠어요.
51년 3월에는 장재엽 부대장이 직접 인솔한 특공대 30명이 신천군 비 황산으로 침투해 들어갔고 그후로도 대원들이 계속 들어가 잠복해 있던 동지들을 규합, 유격전울 벌이다 3백 여명은 고재호 동지의 인솔하에 초 도로 귀환했고 나머지는 전사·실종되고 말았어요.
신 천 중학 재학생이었던 허필순 군은 학생결사대장으로 비 봉산에 침투했다가 3개월만에 적에게 생포돼 사살되면서『나무 가지는 꺾여도 뿌리는 남는다』라고 외치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어요.
비 봉산에 잠입했던 조동환 대원(현 내무부 서무계장)은 52년 3월 신 천 지구 토벌대장이었던 공산군 송부만 중 좌를 포섭해서 데리고 나왔고요.
마 합 도를 거점으로 옹진반도해안일대서 작전을 벌이던 우리 신 천 부대는 52년 9월 적의 대 공격을 받고 기린도로 본부를 옮겼습니다.
우리는 한달 씩 군화를 못 벗고 전투를 하기도 했어요.
이 때의 소규모 기습 전은 강 지(전사)특 공 대장이 주로 많이 지휘했습니다.>

<주요일지> (1952년 1월16·17·18·19일)
※1월16일 ▲공산 측, 국적대표의 입북 거부 ▲한-일 회담 국적 분 위 회의 재개 ▲「수에즈」운하지대에서 영-애 군 충돌.
※1월17일 ▲「리지웨이」사령관, 한국전선시찰 ▲국회, 정부제출 개헌안토의시작 ▲「유엔」정 위, 3개월 안에 전 외국군의 한국철수를 요구한 소 결의안을 42대7로 부결.
※1월18일 ▲국회, 개헌안 1백43대19로 부결 ▲방미중인「처칠」수상, 「트루먼」과 회담.
※1월19일 ▲지리산지구에서 18·19일에 공비 5백89명 사살, 2백37명 생포 ▲애 급 정부, 전국에 비상사태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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