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대사 맡아>(중)
주미대사로 근무한지 얼마 안돼 나는 뜻밖에도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임명됐으니 빨리 귀국하라』는 본국 정부의 훈령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박사를 도와 독립운동을 한다고는 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바가 없었고 관심도 두고있지 않았던 관계로 무척 당황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이박사는 내가 일본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회담에 선입견 없이 공정을 기할 수 있고 영어회화가 유창하니까 당시 일본 정부를 움직이고 있던 「스캐프」(동경주둔 연합군 최고사령부)와의 막후 접촉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일부러 나를 불렀던 모양이다.
당시 우리 나라 대표는 내가 수석이고 김용식 「하와이」총영사가 교체수석, 그밖에 대표에 신성모 주일대사, 유진오 고대 총장, 임송본 식산은행 두취, 홍진기 법무부 법무국장, 유태하 주일대사관 참사관, 갈홍기씨, 그리고 전문위원으로 김동조 외무부 정무국장 등이 참석했다.
회담은 51년10월20일 상오 10시 동경에 있는 연합군 최고사령부 회의실에서 역사적인 개막을 보았다.
나는 이날 개막식에서 『일본은 35년간 한국을 강점, 착취했던 지난날의 죄과를 스스로 반성하는 뜻에서 솔직하고 가면 없는 태도로 회담에 임해줄 것을 당부한다』고 했고 「이구찌」(정구) 일본 수석대표(당시 일본 외무성 외무차관)는 『이번 회담이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한일간의 우호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을 희망한다』고 개회사를 대신했다.
그러나 회담은 당초 예상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가 않았다.
우리측은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 문제와 선박 반환문제 등을 주로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점차 의제를 확대시켜 나갈 것을 주장했으나 일본측의 무성의와 소극적인 태도로 진전되지 않았다.
나는 김용식 대표와 함께 「요시다」(길전) 수상을 방문하고 회담에 성의 있는 태도로 임해줄 것을 촉구하면서 『한일 양국은 미국 등 우방의 지원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처지이니 이 기회에 일본이 모든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하여 전세계에 신뢰감을 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더니 「요시다」수상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회담이 시작된지 거의 한달 만에 나는 중간보고를 하러 잠시 귀국, 이 박사를 만났다.
나는 이 박사에게 그간의 회담경과를 설명하고 예상했던 대로 진전이 안 된다고 보고했더니 이 박사는 대뜸 『우리가 한일회담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나. 미국 친구들이 자꾸 하라고 권하고 또 세계여론을 생각해서 마지못해 하는 것이지. 자네 분명히 들어둬.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는 이 땅에 일장기를 다시 꽂지 못하게 할거야』라면서 의미 있는 웃음을 지어 보여 비로소 이 회담에 대한 이박사의 의중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이듬해 2월15일부터 개최된 제1차 본회담은 우리 나라가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에 요구한 대일청구권에 대해 일본측이 엉뚱하게도 일본인들의 재산청구권을 내세워 결렬이 되고 말았다.
이후 한일회담은 53년4월 제2차 회담이 열린 이래 줄곧 난항을 계속하다가 65년 마침내 타결을 보게됐지만 내가 수석대표로 있던 3차 회담까지 나는 일본관리들과 수 없는 다툼을 해야했다.
3차 회담 때는 내가 수석대표로 이름만 걸어 놓았을 뿐 거의 회담에는 참석치 않았는데 내가 일본에 대한 비난을 너무하니까 미국무성은 나를 3번이나 초치해 지나치게 자극적인 대일강경발언을 삼가 달라고 간청한 일도 있다.
한번은 당시 주미 일대사가 「덜레스」미국무장관을 찾아가 『양 대사의 입을 막아달라』고 요청한 일도 있는데 난처해진 미국무성이 나에게 『일본도 우리(미국)의 동맹이고 한국도 우리의 동맹인데 자꾸 일본 비난을 하고 다니면 입장이 곤란하다』고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지만 이박사의 대일태도가 시종일관했던 것과 같이 나의 대일관 역시 좀처럼 변치 않았다.
내가 한일회담관계로 「워싱턴」을 많이 비운 사이 미국 국내에서는 치열한 선거전 끝에「아이젠하워」장군이 민주당의 「스티븐슨」후보를 눌러 승리,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한국동란의 휴전에 의한 종결이 서서히 매듭지어져 가고 있었다. <계속> [제자는 윤석오]계속>주미대사>
(497)제26화 경무대 사계 여록 내가 아는 이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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