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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만의 희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연기군금남면=윤경운기자】6·25동란 때 참전했다가 퇴로가 막혀 죽을 지경에 이르렀던 한 미군병사가 어느 소년의 정성어린 보호로 살아나자 22년만에 『보은의 편지』를 보내와 한마을이 축제기분에 떠있다.
연기군 금남면 영대리 「음달둔대」마을 임창수씨(40)한테 지난 25일 『살려준 은혜를 꼭 갚겠다』는 랠프·L·길패트리크씨(50)의 편지가 멀리 미국서 날아왔다. 길패트리크씨는 지금 뉴저지주 로빈스빌에 살고 있다. 임씨와 마을사람들은 편지를 받아들고 은혜를 보답하겠다는 사연보다도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더 기뻐했다.
길패트리크 상사는 50년7월12일 조치원 방어선이 무너지자 금강하류인 태평리 전선에 배치됐었다. 그러나 20대1의 적의 우세로 이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퇴로가 막히자 길패트리크 상사는 홀로 산 속엘 찾아들었다. 찾아든 곳이 바로 둔대마을 박산골.
당시 18세 소년이던 임씨는 박산골에 올라 대전이 포격 당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내려오다가 생전 처음 보는 머리가 노란 길패트리크 상사를 보고 놀랐다.
임씨는 낙오병 일거라고 직감했다.
임씨는 이때 카빈을 들이대는 길패트리크 상사를 손짓 발짓으로 안심시켜 산마루 땅굴 속에 숨겨줬다. 그날 밤 배고파하는 길패트리크 상사에게 보리밥과 고추장을 갖다주고 맛있게 치워버리는 미군인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뒤 78일 동안 임씨는 높이 70m의 박산골 길패트리크 상사 보급작전을 은밀히 펴왔다. 밤이면 도시락 3개를 고추장과 함께 날라다줬다.
그러나 길패트리크 상사는 한결같은 고추장밥에 배탈이 나는가하면 심한 변비증을 일으켜 녹초가 돼있었다. 임씨는 하는 수 없이 길패트리크 상사를 자기집 뒷골방으로 옮겨놓았다. 퇴각을 하기 시작한 북괴 패잔병들이 금굴산을 타고 내려와 임씨집에도 노상 찾아들었다.
이들은 밥을 해내라고 위협하면서 길패트리크 상사가 숨어있는 바로 골방 앞 뒷마루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수십 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긴 끝에 10월2일 유엔군의 반격으로 마을청년들의 호위를 받으며 길패트리크 상사는 대평리로 이송돼 미군들에게 넘겨졌다. 지금은 대전에서 사업을 하는 임씨는 그 뒤 22년 동안 6월이 되면 고향 박산골을 찾아 길패트리크 상사의 행운을 빌어왔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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