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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유격전(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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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단군설하구전의 바탕이 되고 있는 구월산에 접한 황해도의 은율·안악·신천·재령·장련·송화군 일대는 6·25전부터 북괴가 말하는 소위 최악의 「반경」지역으로 그들로부터 혹심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백범 김구·설산 장덕수 같은 민족적 선열이 출생한 이 지역은 또한 황해도 기독교의 본산이기도 했다. 이렇게 여러 고향선배 애국지사들의 감화와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자란 이 지역 청년들은 자연히 반공사상에 투철하여 봉기와 폭동 등 온갖 방법으로 공산당과 싸웠다.
이 지역 청년들의 반공투쟁은 북한 어느 지역보다도 격렬하여 북괴는 은율군 장련읍 같은 곳은 「제2의 서울」이라고까지 불렀다.
그 실례로 1945년11월 원춘도 목사가 설립했던 장련중학교 학생들은 끝까지 적기가를 부르지 않았고 은율군 장련면 직전리의 기독교 청년들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떼다 소각시켜 버렸다.

<애국지사와 기독교의 본고장>
또 북괴가 남침준비에 광분하고 있던 1949년 말 은율군 조선민주당 청년들은 허광명씨(학살)를 중심으로 무장봉기를 위한 비밀결사대를 조직하다가 탄로돼 10여명이 사형을 당했다.
은율·안악·신천·재령·장련·송화일대에서 반공투쟁을 하다 끝내는 역부족으로 쫓기고만 청년들과 북괴군사동원으로부터 몸을 피한 수많은 청년들이 모두 구월산으로 들어가 반공유격대가 됐다.
대부분 교인들이었던 이들 청년학생들은 토벌 나온 내무서원을 낫과 곡괭이로 때려 누이기도 하고 때로는 밤에 시내에까지 침투해 들어가 소수의 괴뢰군들을 기습, 무기를 탈취해 오기도 했다.
6·25전부터 이같이 반공투쟁을 격렬히 벌여온 황해도 일대의 청년학생들은 「유엔」군의 북진소식이 전해지자 모두 구월산 거점에서 내려와 인민위원회·내무서 등 북괴 노동당 기관을 접수하였다.
「유엔」군이 38선을 넘기도 전부터 이들은 각급의 노동당 기관을 뺏고 적색분자들을 처치했는데 이중에서도 50년10월 중순의 신천반공 무장청년들의 활약은 괄목 할만 했다.
이들 반공청년들은 고대하던 「유엔」군이 곧바로 경의선을 따라 진격해 버리고 자기 고장에는 입성치 않자 자치적으로 치안대를 조직, 향토치안과 구월산·불타산·멸악산 등에 잠입한 적 패잔병들을 토벌했다.
12월초 뜻하지 않던 「유엔」군의 철수가 시작되자 반공청년들이 버리고 평지에 내려간 틈을 타 구월산에 거점을 확보한 공비들은 시내까지 내려와 습격과 약탈을 하며 준동했다. 이렇게 2개월 여만에 상황이 다시 역전되자 황해도 일대의 반공청년들은 후퇴하는 「유엔」군이 곧 재진격 할 것으로 믿고 그동안 수복한 고향 땅을 사수하기로 했다.
이러한 고향 사수파 청년들과 후퇴로를 차단 당해 못 빠져 나간 반공인사들은 노획한 적 무기로 무장을 하고 밀려 내려오는 괴뢰군과 중공군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은 출신지역별로 고유명의 부대를 창설해 적 정규군과 공비들에게 대항했으나 끝내는 서해안 일대의 도서로 후퇴하였다.
섬으로 들어간 이들 각 의병 부대들은 51년3월부터는 유엔군 유격사령부의 『표작전기지사 당나귀부대』로 모두 편입돼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먼저 구월산의 잔비와 대동강을 건너 황해도로 들어오던 괴뢰군 26여단에 대항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웅도로 후퇴한 연각부대의 얘기를 들어보겠다.
구월산 부대는 연풍부대가 웅도로 후퇴해 평북 백마부대·황해도 송호부대·수월부대와 합류, 부대를 확대하면서 붙인 부대명이다.
▲오병현씨(당시 구월산 부대원·현 수협 경기지부 근무·화) <나는 백종렬(학살) 원숙희·정삼양(조사) 동지 등과 1945년 장련 중학사건, 46년 직전리 김일성 초상화 소각사건, 49년 은율군 조선민주당 비밀결사사건·장련 여중사건 등으로 구월산에 입산한 「반공 빨치산」청년 학생들과 함께 6·25전부터 「게릴라」전을 벌였어요.
구월산에 입산한 우리들은 대부분 교인들이라 신윤철(학살) 신부, 원춘도(옥사) 목사, 천도교의 김득현(학살) 이응호(학살)씨 등을 우리의 사상적인 지주로 삼았어요.
49년에는 이같은 반공청년학생들과 괴뢰군 군사동원을 기피해 올라온 장련·은율지방의 반공청년들이 1백20여명이 됐었읍니다.
우리는 구월산의 험준한 계곡에 기지를 설치하고 장마리아 여사·박순실·이정자양 등 천주교 신자와 여학생 김진용·김영옥(학살) 이용화(학살) 임창근양(학살)등 여자 동지들을 통해 적정을 살피게 하고 마을에 내려가 창과 도끼 등을 가져오게 했읍니다. 이들 여자 동지들은 후에 거의 적에게 체포돼 심한 옥고를 치렀어요.

<출신지역별 고유명 부대 창설>
무기는 토벌 나오는 내무 서원 것과 개별적으로 통행하는 괴뢰군 등을 기습해 탈취했어요.
우리는 내무서에 근무하는 동지들의 제보로 대대적인 토벌은 잘 피할 수 있었어요.
하옇든 장련지방은 6·25전까지도 노동당이 거의 발을 못 붙였고 부락민 청위원회도 조직 못한 곳이 많았어요.
6·25가 발발하면서부터는 은율·안악·신천·송화·장연군 등에서 수많은 반공인사와 종교인들이 구월산으로 대거 집결했어요.
유엔군이 해주 가까이 진격해왔던 50년10월10일 밤10시 우리는 장련 사직골에 대표가 모여 백기택·임병환·이영익·박종택씨 등을 치안서 간부로 추재하고 앞으로의 치안을 논의했읍니다.
10월13일 신천·안악·재령 일대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패주하던 괴뢰군들은 대동강을 도하해 평양으로 들어가려고 구월산맥 서부 장련지방으로 몰려왔어요.
이때부터 우리 장련지방에는 늘 3천 여명의 적 패잔병들이 몰려 득실거렸어요.
구월산서 내려온 우리 장련 청년 1백 여명은 무장특공대를 조직, 저도를 향해 몰러든 적 패잔병들과 우리가 있던 거점으로 입산한 잔비 및 공산당원들의 토벌전을 벌이기 시작했읍니다.
10월18일 밤 우리는 장련읍을 장악하고 도주하는 각 기관요원과 악질당원 2천 여명을 검거, 처단했어요.
우리 장련 무장특공대는 이진호(전사) 대장의 지휘로 매일 밤 하산하는 구월산 잔비들과 유혈전을 벌이며 치안유지에 조력했읍니다.>

<장련 장악 악질당원 2천 검거>
▲이영기씨(당시 구월산 부대부관·현 인천서 토건업·45) <북진했던 「유엔」군이 철수하기 시작한 50년12월초부터 구월산의 잔비들이 소위 장련지방 해방을 위한 총력전을 벌였어요.
1950년11월23일 본대를 찾아 평양으로 올라가던 김종벽 육군대위가 약간의 장비와 5∼6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고향인 장련엘 들렀습니다.
12월4일 유엔군이 대동강 철교를 폭파하고 5일에는 진남포를 포기해 버리자 우리 장련읍 일대는 피난민들로 혼잡을 이루었고 밤마다 구월산에 잠입했던 3천 여명의 북괴 정규군 패잔병들이 기습해 왔어요.
우리 장련 치안대의 무장특공대원 1백50여명은 50년12월7일 그동안 노획했던 적 무기 40여정을 가지고 김종벽 대위와 함께 유격대를 조직, 장련고을의 옛 이름을 따 연풍부대로 명명했읍니다.
간부진용은 김 대위가 부대장이 되고 이진호·이명철·신문수·신정균·김수업 동지가 참모 일을 맡았어요.
중대장은 홍현택(포로) 이재섭(전사) 이태영 동지가 됐고 진남포에서 건너오는 적을 공격하는 요새지인 저도 소대장은 배두서(전사) 동지가 했어요.
우리 연풍부대 유격대원들은 12월8일부터 김 대위의 지휘를 받으며 기습해 오는 공비들에 대항해 계속 혈전을 벌였어요.
우리 연풍부대는 9일과 11일 밤 장련 읍내를 기습해온 공비들을 모두 격퇴시켰고 13일에는 장련 해방을 시킨다고 내려온 구월산 공비주력 3백 여명을 북병전술로 공격해 30여명을 사살하고 격퇴시켰어요.
12월22일에는 북으로 퇴각했다 진남포를 거쳐 건너오는 북괴 황해도 각급 기관 요원 1백 여명을 기습, 섬멸해 버렸어요. 이렇게 되자 구월산 공비들은 장련 지방의 기습전을 포기하고 신천·안악·은율·송화지방으로 달려들었어요.
12월26일에는 우리 연풍부대의 저도 방위대 본부를 기습했던 3백 여명의 북괴군을 반격해 27명을 사살하고 50여정의 무기를 노획했읍니다.>
▲김종벽씨(당시 구월산 부대장=육군대위·예비역육군소령·현 의정부서 사업·58) <나는 11월 하순 동부전선의 내 소속부대를 찾아 가는 길에 고향인 황해도 장련읍을 들렀습니다. 빈약한 무기로 구월산 공비들과 용감히 싸우는 고향 청년 동지들을 보고 나는 이들과 같이 싸우기로 결심하고 무장 특공대원들을 지휘하면서 부대창설을 서둘렀어요.< p>

<서해섬 기지로 후방 교란작전>
나는 12월 초순 장련지방 치안대 무장청년들을 기간으로 해서 연풍부대를 창설하고 직접 전투지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연풍부대는 53년 휴전이 될 때까지 구월산 부대, 「동키」-2 「동키」-20등의 부대 칭호를 가지면서 서해안 섬들을 기지로 「게릴라」전을 벌여 적 후방을 교란시키고 남하치 못한 수많은 동포들을 구출해 내오는 등 눈부신 활약을 했어요.
1950년부터 53년까지 구월산 부대가 유격전을 벌여 올린 전과는 적 사살이 1천3백 여명, 생포가 2천3백 여명이고 노획한 무기가 5백80여정에 이릅니다.
도로·교량·기관건물·철교 등의 폭파나 파괴는 수없이 많았어요.
한편 우리 부대원도 6백11명이 전사하고 1백3명이 부상·실종됐읍니다.>
◇주요일지(1951년11월15·16·17·18일)
※12월15일 ▲전전선 산발적인 탐색전정도 ▲유엔군 한국전쟁서 8억5천만장 이상의 전전철포했다고 미 육군 당국 발표
※12월16일 ▲「이탈리아」병원부대 활동개시 ▲「덜레스」씨 내한, 전선시찰
※12월17일 ▲「유엔」공군 적 보급차량 1백여대 파괴 ▲원외신당발기인대회, 당수에 이 대통령을 추대키로 결의 ▲「처칠」영 수상 영·불 회담차 파리 도착
※12월18일 ▲「리」장군·「밴」사령관·「조이」수석대표 문산서 중요회담 ▲포로교환합동분위, 공산측 대표 포로명부 제출에 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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