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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제 26화><내가 아는 이박사|경무대 사계 여록>(118)이재학<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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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 박사와 자유당(하)
자유당 말기에 접어들면서 이 박사는 더욱 당의 일을 이기붕씨한테 일임하고 오직 외교에만 전념하는 것 같았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우리 나라의 운명은 외교에 달려있다』『공산당이 남침하면 세계가 막아줄 것이나 한가지 걱정은 일본』이라고 하는 말을 여러번 들은 기억이 새롭다.
이박사의 반일정책과 대미외교는 바로 그러한 정치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약간 얘기가 빗나가지만 외교관계 일화 한마디만 덧붙이고 넘어갈까 한다.
이 박사는 주한미국대사와 얘기가 잘 안되거나 미국정부에서 비위틀리는 대한정책을 쓰면, 이내 잘 아는 미국상원의원들한테 편지를 직접 써 보내곤 했다.
우리들이 미국대사 초청을 받았다는 보고를 하면, 이 박사는 『교제는 좋지만 가서 얻어먹지 말라』면서『자네들이 불러서 얘기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환율 5백대 1을 5년간 유지한 것은 전혀 이박사의 어거지 외교의 결과였다.
미국정부에서 「달러」값이 한국에서 가장 천대받는다고 현실화를 요구해 오면 『당신네 나라가 우리를 도우려는 나라냐』고 호통을 치곤 해서 번번이 허탕을 치고 돌아갔다.
이 박사는 야당의 존재를 존중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다만 사회주의 정당의 활동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우리는 사회당을 인정하자고 했다. 사회당이 있으면 야당이 분립돼 집권당엔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그분에겐 사회주의 정당은 공산당과 비슷한 것이어서 말을 꺼낼 여지조차 없었다.
비유가 안 좋지만, 이 박사에게는 야당의 거물급도 손자뻘로 생각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국회에서 무소속이면서 야당편에선 창낭(장택상)이 이대통령 규탄 연설을 한 일이 있다.
그 얘기가 어떻게 경무대까지 전해져 이박사가 창낭을 불러들였다.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자네가 어떻게 그런 비난을 나에게 할 수 있는가』고 호통을 받은 창낭은 바지 통을 걷어올리면서『각하, 잘못했습니다. 종아리를 때려 주십시오』했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이박사가 야당 간부 중에 그래도 가장 좋아하고 능력을 높이 평가한 분은 유석(조병옥)이었다.
유석은 자유당 인사들에게도 인기가 있었고 존경을 받았다. 그야말로 비화에 속하는 얘기지만, 고령의 이 박사 후계자로 우리들은 유석을 지목하고 있었다.
세상사람들은 만송이 이박사의 뒤를 있는 게 아닌가 했으나 본인자신도 건강에 자신이 없을 뿐 아니라 능력의 한개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자유당 간부들끼리는 유석을 이 박사 후계자로 추대한다는데 거의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뿐 아니라 경무대 비서실과도 얘기가 되어 이 박사를 나쁘게 말한 유석의 증언이 실린 신문은 이박사의 눈에 안 띄도록 했다. 또 나 자신도 이 박사 비난연설을 하려고 할 때는 다른 사람을 시키라고 만류한 적이 많았다.
이박사의 유석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 박사는 자기의 정적과 싸우는데는 무서울이만큼 철저했다. 그러나 그분은 자기의 정치이념과 목표를 달성하는데 그쳤지, 보복을 하거나 없애버리려고는 결코 하지 않았다.
야당인사가 자신에 대해 아무리 비난발언을 해도 쾌씸하게는 여겼어도 보복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나는 갖고 있다.
이 박사는 중대한 외교문제가 있을 때 「데모」를 벌이게 해서 이를 배경으로 외교공세를 취하는 방법도 썼지만, 야당탄압을 위한 민중 「데모」조작이니 「테러」는 결코 그분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 밑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적어두고자 한다.
이박사의 국회관은 『국회의사당을 잘 지어 놓는 것이 내 꿈의 하나다』라고 우리들에게 말한 것에서 단적으로 표시된다.
수복 후 국회 건물로 중앙청을 사용하려다 일본총독부로 쓰던 것이라 안 된다는 이대통령의 반대로 우리는 종묘에 국회당사를 지으려 한일이 있다.
그랬더니 이 박사는 『더 넓은 곳에 짓도록 하라』고해서 취소되고 물색 끝에 남산 야외음악당 자리를 잡았다.
국회청사 기공식장에서 이 박사는 나에게 조용히『국회청사를 이렇게 좋은 곳에 짓게되니 내 맘이 매우 기쁘네』라고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 박사는 「유엔」대책 등 중요한 외교문제는 국회에서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고 해서 그분의 이런 종용에 외교관계 결의안을 통과시킨 일도 많다.
내가 이 박사를 마지막 만난 것은 4·19직전 마산 학생의거가 일어난 뒤였다.
만송·한희석·임철호씨와 내가 이박사의 부름으로 경무대에 올라가서였다.
이 박사는 마산학생 「데모」가 공산당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이며 국회가 소란한 이유는 내가 국회의장운동을 하기 때문인 것으로 잘못 보고 받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선거협정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라고 말했으나, 이대통령은 그 말엔 아무 대답 없이 『자네들 서로 경쟁하지 말고 화합해서 일을 잘 해야해』하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이재학씨의 글은 3회로 끝내고 다음은 임영신씨의 글을 싣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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