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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화제 모은「데이비스」양 사건 무죄 판결|배심원은 모두 중류계급의 백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폭력 혁명을 신봉하는 과격파 흑인 처녀 「앤절러·데이비스」의 살인·유괴·범죄 모의 혐의 공판이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면서 22개월 동안 진행된 끝에 지난 4일 무죄 선고가 내려 다시 한번 화제의 물결을 일으켰다.
사건의 발단부터 소개하면..
70년 8월7일「샌프런시스코」북쪽「마린」군 재판소에서는「해럴드·헤일리」판사 담당으로 「제임즈·매클레인」이라는 흑인 피고에 대한 공판이 열리고 있었다. 「샌뭰틴」형무소 간수 살해 혐의였다.
공판이 진행 중일 때 「조너던·잭슨」이라는 17세의 흑인 소년이 손가방을 들고 법정에 들어왔다. 그는 날쌘 동작으로 손가방 속에서 권총 3자루를 꺼내어 간수들을 무장 해체시키고 피고 「매클레인」과 피고 측 증인에게 권총을 넘겨줬다. 그리고 그들은 「헤일리」판사를 납치했다.
「매클레인」은 그들의 목적이「솔라드·브러더즈」회원들을 구출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솔라드·브러더즈」란 「조너던」 소년의 형 「조지·잭슨」·「존·클라치트」·「플리터·드람고」를 말했다. 그들은 모두 흑인 과격파들로서 「솔라드」 형무소에 복역중 역시 간수 살해 혐의 재판을 받는 중이었다.
「조너던·잭슨」과 「매클레인」은 뒤쫓는 경찰과 총 성전을 벌이다가 죽고 「해일리」 판사도 피살되었다. 사진 수사에 착수한 연방수사국(FBI)은 ①권총 주인이 「앤절러·데이비스」고 ②「조너던」의 손가방에 그녀의 책이 들어 있었고 ③「조너던」의 형「조지·잭슨」은 「앤절러」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
그녀는 1급살인·유괴·법죄 모의 혐의로 기소되고 3개월 뒤「뉴요크」서 검거, 투옥되었다.
그러나 「앤절러」가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사건은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앤절러」는 「로스앤젤레스」의 「캘리포니아」대학(UCLA)의 철학 강사였는데 69년 공산 당원임이 밝혀져 파면 당한 사건으로 일약 유명해졌다.
그녀는 「브랜라이스」대학 재학 중 폭력 혁명을 제창하는 「허버트·마르쿠제」교수의 수제자로 과격한 혁명 사상을 흡수하고, 「프랑스」의 「소르본」과 서독의「프랑크푸르트」대학에 유학했다.
「앤절러」는 「칸트」의 「프랑스」 혁명에 나타난 폭력에 관한 연구를 박사 학위 논문으로 연구하다가 UCLA서 쫓겨나는 바람에 학위논문을 끝내지 못했다. 「뉴요크」서 검거된 「앤절러」는 사건 관련을 부인했다.
인종차별의 온상인 「앨라배마」주 「버밍햄」출신인 「앤절러」는 남부 출신 흑인이 총기를 지니는 것은 생활의 일부라고 말하고, 사건이 일어난 뒤 피신한 것은 본능적인 반응이라고 주장했다.
공판이 시작되자 미국 각지에서 「앤절러」의 자유를 위한 흑인 「데모」가 일어났다. 사건은 즉시 국제 문제화하여 동구 공산권은 「앤절러」가 흑인이고 공산 당원이며 과격한 혁명 이론가이기 때문에 희생되는 것이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앤절러」사건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릴 남자 5명, 여자 7명의 배심원이 모두 중류계급의 백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공산국가들과 미국 내 과격파 흑인들은 그런 상황에서 공정한 판결을 기대할 수 없다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인종적인 편견이 강하다는 서부의 백인 중산계급을 대표하는 배심원들은 마침내「앤절러」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예상대로 공산국가들은 이 무죄 판결이 세계 여론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앤절러」의 어머니는 지난 22개월이『악몽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폭력 혁명의 「영웅」 한사람을 탄생시켰다.
사건의 결말을 본「워싱턴·포스트」와 「뉴요크·타임스」는 각각 다른 각도에서 침울한 반응을 보였다. 「워싱턴·포스트」사설은 「앤절러」의 무죄 판결을 환영하면서, 그러나 「앤절러」만큼 유명하지 않은 흑인 피고인들에 대한 공정한 판결의 부재를 개탄했다. 「뉴요크·타임스」는 주로 백인들로 구성되는 이 나라 배심원 제도가 특히 정치적 이단자들과 흑인 혁명가들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는 「신화」가 「앤절러」에 대한 판결로써 무너져야 할 일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럴 것 같지가 않다고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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