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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안중근 의사를 오스왈드, 문세광에 비유하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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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본의 첫 총리(수상)인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일본 정치사에서 특이한 기록을 갖고 있다. 역대 총리 중 전쟁이 아닌 상황에서 살인을 저지른 유일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살인뿐 아니라 외국 공관에 대한 테러도 자행했다. 20세 전후의 그는 열렬한 존황양이(尊皇攘夷·천황을 받들고 서구열강을 물리침)주의자였다. 1862년, 이토는 저명한 국학자 하나와 호키이치의 아들이자 같은 국학자이던 하나와 지로가 막부의 의뢰로 천황 폐위 선례를 조사한다는 소문을 듣고 격분했다. 동지 야마오 요조와 함께 칼을 휘둘러 하나와를 살해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인물(나가이 우타)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적도 있다. 1862년 12월에는 영국 공사관 방화 사건에 가담했다. 살인범이자 테러리스트였던 셈이다.

 이토는 직후인 1863년 조슈번(藩)의 비밀명령을 받고 동료 4명과 함께 영국으로 밀항한다. 일생 일대의 전기(轉機)이자 일본의 운명에도 큰 영향을 준 남몰래 유학이었다. 최강국 영국에서 신문명과 국제정세에 눈을 뜬 것이다. 이토·이노우에 가오루·야마오 요조 등 5명은 귀국 후 일본이 신흥열강으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했고, 지금도 ‘조슈 5걸(傑)’로 불리며 칭송받고 있다. 올해 밀항 150주년을 맞아 지난 7월 이토 일행을 도와준 영국인 교수 부부를 기리는 기념비가 영국에서 제막됐고, 아베 신조 총리는 감사장을 보냈다.

 이미 당대에 “메이지 시대의 태산교악(泰山喬嶽)”(도쿠토미 소호)이라 불린 이토이지만, 한국인 입장에선 ‘침략의 원흉’이라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만큼 한·일 강제병합과 이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혹자는 그가 정한론(征韓論)에 반대했다는 점을 든다. 그러나 신중한 점진론자로서 힘을 더 기르고, 국제정세가 우호적일 때를 기다리는 쪽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을사늑약에서 강제병합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모든 것을 증명한다.

 중국 하얼빈역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곳이다. 여기에 표지석을 세우는 일에 관방장관을 비롯한 일본 측 인사들이 “안중근은 범죄자”라 부르며 반발하고 있다. 더 고약한 것은 ‘모친을 살해한 문세광의 상(像)을 서울역전에 세우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임을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 깨닫지 못하신다’(11월 20일자 산케이 신문) 같은 황당한 비유까지 동원되는 점이다. 일본의 한 전직 외교관은 “미국에서 ‘하얼빈의 안중근 기념비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댈러스시에 암살범 오스왈드의 기념비를 세우려는 것과 같다’고 강연하면 청중들이 찬물 뿌린 듯 조용해진다”고 대놓고 자랑했다(10월 29일자 요미우리 신문). 일말의 역지사지(易地思之)조차 없는 경박함에 그저 혀를 찰 수밖에 없는 건가.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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