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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의 선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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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기준의 선택』이라는 말이 있다. 생태학에서 쓰는 용어이다.
이런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숲을 갉아먹는 벌레들이 걷잡을 수 없이 번성한다. 그것을 막기 위해 DDT(구충제)를 뿌린다. 해충들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 독약은 꿀벌들까지도 모두 죽여버렸다. 뿐만 아니라 이 DDT는 시냇물에 씻겨 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물고기들마저 죽는다. 이번엔 바다에서 조개들이 또 DDT를 먹는다. 결국 DDT는 사람의 입을 통해 인체에 축적된다. 인간은 그 중독으로 신음한다.
가령 경주 토함산일대의 산림구충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 뿌린 농약은 근방의 누에들을 온통 죽여 버렸다.
이 경우 『기준의 선택』은 심각한 문제이다. 숲은 적당히 보호되었지만, 인간과 그밖에 자연은 그 부작용으로 파멸이 되어간다. 그럼 어느 쪽을 선택 할 것인가? 생태학자들의 고민은 바로 이런데도 있다.
환경문제는 궁극적으로 윤리 문제로 돌아간다. 문제의 초점은 인간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살아 있는 인간뿐이 아니라 내일, 이 세상에 태어날 인간은 자연과의 투쟁이 아니라 그 자신과 싸우게 되었다. 과학의 진보는 자연의 균형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있다. 진보나 문명 그 자체가 그들의 주인공인 인간을 위협하는 역설과 모순 속에 빠지게 된 것이다.
기술적 진보는 어느 의미로는 무조건 환영할 수 없다. 그 한계성을 언제나 뼈아프게 의식하게 된다. 핵 에네르기의 개발은 인류전멸의 공포 앞에서 깊은 회의를 빚어냈다. 석유와 석탄의 연소는 산소의 양을 격감시켜, 인간의 호흡을 가쁘게 하고 있다. 식량증산은 농약의 독성을 날로 누적 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발전」이란 무슨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가?
『조화 있는 기준』의 선택은 이상적이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환경도 보호되어야한다. 그 환경의 보호는 결국 자연의 균형은 인류의 오늘을 있게 해주었다. 또한 인류의 미래도 그것에 의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질서 중에 어느 한가지만에 편중할 때, 그 질서의 균형은 깨어지고 만다. 따라서 자연의 인간에게 무가치한 존재로 판단된다. 이것은 곧 인류의 파국을 몰고 올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문명은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도 「덕치」를 요구한다. 「덕치」는 인간의 높은 도덕적 수준에서 위에서만 가능하다. 「발전」과 「진보」를 외치는 정치인들은 그것만을 위한 일원적 가치관을 버려야 할 것이다. 무조건의 선은 선이 아니다. 「후진」과 「선진」의 평가는 단순히 물질문명의 그것만으로 할 수 없다. 도덕적 기준의 선택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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