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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진조국사(고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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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고려시대 불교의 특징은 「진호국가의 불교」로서, 불교의 모든 신앙, 모든 행사는 그 목적이 모두 국가의 안태를 진호하는데 있었다. 이것은 국가의 요청이었으므로 불교는 이에 수응만 해 가면 승려의 의무는 다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국가로서는 불교보호에 극진하였고 승려우대에 부심 하였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즉 수많은 왕사와 국사의 배출이요, 빈번한 반승 대회였다.
불교자체로 보아서는 가위 황금시대라 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러나 불교자체의 내용, 즉 교학연구가 활발하고 실수실천의 내용이 충실했어야 할 것인데 불행히도 그러지 못했었다. 교학연구는 전혀 보잘 것이 없었고, 실천면에 있어서도 이른바 구산선문이 각립하여 있기는 하였으나 서로 질시, 대립하였을 뿐 교단의 통합력도 없었던 것 같다. 교학과 행이 이와 같고 보니 불교에 무슨 내실이 있었겠는가?
이러한 교단의 실태를 보고 분연 궐기한 분이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요, 지눌 진조국사였다.
보조국사(1210년 입적)는 그 속성이 정씨요 스스로 수우자라 호하였다. 경서 동주(현 황해도 서흥군) 사람이다. 8세에 조계의 운손인 종휘문하에 출가하였고, 25세에 승선에 입선하였다가 그후 얼마 안되어 남유해서 창평(현 전남 나주 군) 청원사에 이르러서 장석을 걸었다. 어느 날 『육조단경』을 읽다가 <진여자성이 기념하면 육근이 비록 견문각지하나 만상에 물들지 않고(부염) 진성이 항상 자재 하다>라는 글에 이르러 경희하고 일어나 불전을 돌면서 송을 외어 이것을 생각하여 자득한 바가 있었다한다.
1185년에는 하가산진문사(현 경북예천군)에 머무르면서 대장경을 읽다가 중국 이통현장자의 『화엄론』을 얻어서 수결소은, 마음을 원돈의 관문에 잠주하였다. 때마침 구우인 득재라는 사람이 그를 청해 현 경북 영천군 팔공산 거조사에 있게 하였다. 여기서 습정균비의 공부에 일야부태하기 수년만인 1188년에 선우들과 더불어 지리산 상무주 암에 수지 하였다. 이로부터 외연을 끊고 내관 전정하여 득법의 서상이 있었다.
하루는 『대공어록』을 얻어서 <선은 부재정처요, 역부재갑처며 부재일용응녹처요, 부재사량분별처>라는 글에 이르러 홀연 계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혜해가 더욱 높고 뭇 사람의 숭앙하는바가 되었다. 송광산 길상사에 옮겨있기 11년, 혹은 담도, 혹은 수선, 사방의 학자가 복주하고 왕공사조, 투명인사자가 또한 수백 인이었다 한다.
그가 고려불교사상 특기되는 것은 정과 혜를 쌍수 하라고 고취한 점에 있다.
당시의 불교계는 오교(교학전공) 양종(수선위주)에 있어 혜위주의 교는 정(선)을 경시하고 또 선정 위주의 양선종(기설은 구산이 대립)은 교를 무시했다. 그의 유저 중 가장 역저인 『권수정혜결사문』은 이 시폐를 들어 정혜쌍수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국사는 송광산에 입산한 이후로는 독실한 수선 실천인으로서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전력을 경주하였다.
이에 얼마나 정력을 쏟았던가 하는 것은 그의 문하에서 16대에 걸쳐서 16국사가 대대로 계속 나온 사실에 의해서도 알 수 있으니 진각·청진·진명·회당·자정·원일·자각·담당·묘명·자원·상각·각엄·정혜·홍진·고봉 등이 그들이다. 불교전래 1천6백년 이래 이런 성사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리고 지눌의 「정상쌍수·교선일치」의 사조는 대가 바뀐 이조시대에 와서나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은연중 불교계의 주조류를 이루고 있으니 국사의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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