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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제26화>경무대사계(98)|우제하<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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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박사의 하야>(중)
『국민이 아직 살아있구먼.』 이 한마디로 이박사의 의중은 헤아릴 수 있음직 했다.
그러나 장관들은 그런 이 박사에게서 오히려 노 애국자다운 모습을 저린 마음으로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몇 국무위원들은 사태수습을 위한 강경책을 건의했다.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계엄군으로 하여금 수도의 치안을 우선 바로 잡게 한 뒤 「데모」학생들이 요구하는 사항을 정리해서 그 중 온당한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사태는 가라앉힐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 박사는 이런 미봉책이 더 큰 혼란과 희생을 수반하게 되리라는 것을 이젠 분명히 깨닫고 있는 듯 했다. 이 박사는 결연히 말했다.
『국민이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돼. 부정을 보고서 항거하지 않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야. 내가 그만두면 돼』라고 강경론을 책망했다.
이 박사의 결심은 단호했다. 다만 뒤를 맡아 사태를 수습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4월19일 상오10시40분 국무회의를 끝내면서 이 박사는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렸다.
『여러분이 짐작하겠지만 정부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책임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냥 두어서는 안돼. 심상히 두어서는 안되고 결단을 내려야 해』라고 이른 것이다.
국무위원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경무대를 나와 중앙청으로 돌아왔다. 으례 하던 관례대로 역시 중앙청에서 국무회의가 계속됐다.
누군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이 박사의 말은 이 의장(만송을 가리킴)을 두고 한말이니 우리가 이 박사의 뜻을 전해야한다 했다.
그런 말에 대해 그것은 국무회의서 결정할 성질이 아니라는 의견이 나오고 그런 형식적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비상사태 하에서 대통령의 뜻을 옳게 받드는 것이 국무위원들이 해야할 일이 아니냐는 반론도 있었다.
이런 설왕설래가 계속되고 있는데 「데모」학생들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중앙청으로 육박해왔다. 결국 국무회의는 「데모」때문에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데모」대중 일부는 중앙청으로 쇄도하고 일부는 경무대로 밀려갔다. 경무대로 가는 길엔 경찰이 미리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고 이 저지선이 무너지려하자 경관이 발포해 1백여명의 희생자가 생겼다.
파출소가 불타고 경찰의 순찰차를 포함해서 일부 차량이 「데모」대에 탈취했다. 경찰은 수도치안을 확보할 능력을 상실했다. 이런 속에서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등 5대 도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혼란 속에서 경무대 비서실에서도 만송이 책임지고 물러나야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곽영주 경무관은 만송에게 결단을 촉구해야 한다고 서둘렀다. 그러나 「데모」로 무엇을 차근차근 처리해 나갈 경황이 없었다.
3·15부정선거이후 나는 거의 매일같이 경무대를 드나들었다. 아무래도 이대통령이 만송과 자유당을 끼고 돌다가 변을 당할 기분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경무대에 들어가면 우선 경찰서 사찰계에 들러 정보를 알아보고 경관들에게 『할아버님께 경보 좀 제때 제때에 보고하라』고 말하고는 별관비서실로 간다.
내가 보기에도 별관 비서실까지는 측근세력이 아니라 그런지 『대통령을 이렇게 보좌해서는 안 된다』고 걱정하는 얘기를 자주 들었고 내가 가면 『각하께 바른 말좀 하라』고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본관비서실에 가면 내놓고 싫어는 안 해도 경계하는 눈치가 역연 했다.
4·19날은 경무대 앞이 난장판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저녁 삼청동 쪽 뒷문으로 들어가 보니 비서실은 모두 얼이 빠져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매카나기」주한미국대사가 경무대로 이 박사를 찾아왔다. 「매카나기」대사는 이 박사에게 사태를 설명하고 수습을 위한 미국 쪽의 의견을 얘기했다고 한다.
이날 누군가에 의해 사태수습을 위해선 만송이 공직에서 물러나고 부통령선거는 다시 하도록 해야한다는 의견이 전달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국무위원도, 경무대비서실도, 그리고 만송을 비롯한 자유당 간부들도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허둥대기만 하는 속에 4월19일의 밤도 저물었다.
계엄군인 15사단에 의해 치안이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21일 낮 이 박사는 비서들에게 허정씨와 변영태씨를 경무대로 들어오도록 연락하라고 일렀다.
그런데 어쩐 셈인지 연락이 닿지 않는다 해서 두 사람 모두 경무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박사는 몇 차례나 독촉을 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이 박사는 다음날로 허정씨를 들어오도록 연락하라고 했다.
이 박사는 다음날 22일 비서를 보내 허정씨를 불러 들였다. 경무대 앞을 조그만 정자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이 박사가 허씨를 맞았을 때의 얼굴은 어느 때 보다도 수척하고 경련도 좀더 심한 것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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