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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참에 새 CD 발탁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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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호 21면

제일모직 구호의 정구호(사진) 전무가 전격 사임한 것은 지난주 패션계의 최대 뉴스였다. 지난 9월 파리 컬렉션을 치르고 나자마자 “다음 쇼장을 알아봐야 한다”던 그가 사표를 던진 걸 보면 ‘전격’이라는 말이 과장은 아니다.

스타일#: 정구호 떠난 이후의 구호(KUHO)

이를 단순한 대기업 전무의 퇴임으로 보기만은 어렵다. 정구호가 누구인가. 1997년 자신의 이름을 따 론칭한 ‘구호’를 통해 그는 당시 국내 브랜드에서 볼 수 없었던 아방가르드 미니멀리즘을 선보였다. 이제는 그 비슷한 디자인만 봐도 ‘구호 스타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뿐인가. 지금이야 정욱준·김재현 등 대기업에 들어간 디자이너가 많아졌지만 그 출발선은 정구호가 끊었다. 2003년 제일모직으로의 입성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매출이 12배 가까이 늘었고 그의 휘하에 르베이지, 데레쿠니, 에피타프 등 제일모직 여성복 브랜드가 움직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제 패션에서 할 것은 다 했다”면서 평소 관심 많던 미술·공연 등 예술계로 눈길을 돌리겠단다. 영화 ‘정사’ ‘스캔들’ ‘황진이’로부터 시작해 국립발레단의 ‘포이즌’, 국립무용단의 ‘단’에서 미술·의상을 맡아 ‘부업’으로 하던 일을 이제 전업으로 삼겠다는 얘기다. 다음달 6~8일에는 연출·의상·무대를 맡은 국립무용단의 신작 ‘묵향’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패션과의 결별을 택한 그의 의사를 존중하는 동시에 바로 드는 궁금증. 과연 구호는 누가 맡을 것이냐다. 그리고 구호는 과연 계속 존재할 수 있는가다.

이에 대한 제일모직 측의 답변은 이렇다. “이미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춘 디자이너 팀이 존재해요. 정 전무가 없어도 구호를 만들어 나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죠.”

디자인의 질이나 브랜드 연속성만 따지자면 그런 주장에 쉽게 동의가 간다. 어쩌면 정구호보다 더 구호 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있을 사람들이 디자인 팀원들일 테니까. 하지만 패션이란 ‘변한다는 속성이 안 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빈 자리를 그렇게 정지 상태로 두어야 할까 싶다. 대안으로 생각해 봄직한 건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이하 CD)의 발탁이다.

세계 패션계에선 브랜드의 디자인 수장인 CD가 이슈가 된다. 얼마 전 루이뷔통 CD를 맡던 마크 제이콥스가 물러나자 후임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발렌시아가를 알렉산더 왕에게 물려줬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가 될 거라는 소문이 한동안 무성했는데, 결국 예측대로 그가 자리를 채웠다. 지난달 버버리의 CD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애플로 떠난 안젤라 아렌츠를 대신해 CEO까지 오르는 영전 뉴스도 큰 화제를 모았다. 2010년 세상을 떠난 알렉산더 매퀸의 자리를 누가 이어받을지는 거의 첩보전에 가까웠다. 그 이듬해 유대인 폄하 발언으로 물러난 존 갈리아노 대신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CD가 누가 될 것인지도 패션피플들의 맛있는 수다거리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미니멀리즘의 대표주자인 라프 시몬스가 발탁되자 그 반전 효과는 배로 커졌다.

이처럼 CD는 늘 화제의 중심에 선다. 누가 디자인을 맡느냐에 따라 브랜드의 색깔이 확 달라지고, 그에 따라 성패의 운명이 갈리기 때문이다. 마이클 코어스가 떠난 뒤 침체기를 보이던 셀린느를 맡아 가장 핫한 브랜드 중 하나로 탈바꿈시킨 피비 파일로, 비(非)디자이너 출신임에도 겐조를 2013 최고의 브랜드로 만든 캐롤 림과 움베르트 레온만 봐도 그렇다.

구호에 새로운 CD가 영입됐으면 하는 바람은 이런 ‘그림’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국내 패션계에도 맨파워를 통해 브랜드가 새롭게 재탄생하고 외국 CD들의 흔한 표현처럼 ‘브랜드 전통에 현대를 접목시켰다’는 디자인을 접할 수 있으리라는 것, 또 하나는 이런 이슈 몰이로 침체된 국내 패션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뭣보다 미국을 거쳐 파리에서 호평받는 구호의 컬렉션 라인 ‘헥사바이 구호’를 멈추지 않을 방법이기도 하다. 지금도 잘나가는 브랜드에 왜 그런 모험이 필요하냐고? 하지만 정구호 없는 구호를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 않나. 그럴 바엔 별로 나쁘지 않은 베팅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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