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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덕수궁 앞 적군 시체 치우다 고종 국새 발견”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지난 18일 미국 당국에 압수된 조선 및 대한제국 인장들. 왼쪽부터 대한제국 국새인 ‘황제지보(皇帝之寶)’, 조선 헌종의 서화 감상인 ‘향천심정서화지기(香泉審定書畵之記)’, 조선 왕실에서 관리 임명 때 사용했던 ‘유서지보(諭書之寶)’. [사진 문화재청]

미국에서 고종의 국새(國璽)와 어보(御寶) 등 조선왕실 및 대한제국 인장 9점이 발견된 뒤(중앙일보 11월 22일자 1면) 이들 유물의 구체적 유출과 압수 과정이 드러나고 있다. 미주 LA중앙일보 취재 결과 이 인장들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 해병이 북한군 또는 중공군으로 추정되는 시체 밑에서 발견한 것으로 그가 양말에 담아 미국으로 몰래 가져간 것으로 밝혀졌다. 또 최근 숨진 발견자의 유족이 이 유물들이 고가품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감정을 의뢰했다가 도난품이라는 게 확인된 것으로 나타났다.

 LA중앙일보와 통화한 미 해병 장교의 사위 에릭 보우가 전해온 사연은 이랬다. 한국전 발발 3개월째로 접어든 1950년 9월, 서울의 덕수궁 정문 인근. 미 해병 윌리엄 패턴은 문 주변에 쌓인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체를 치우라는 지시를 받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선 전투가 치열했고 덕수궁은 임시 병원으로 사용 중이었다. 이때 한 시체 밑에서 독특한 물건을 발견했다.

 그는 그 물건들을 양말에 담았고 이를 1951년 미국으로 귀국할 때 가져왔다. 이후 62년 동안 이 유물들은 패턴의 집 장식장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었다. 패턴은 해병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러다 지난해 5월 초. 에릭의 처남(패턴의 아들)이 동양의 유물 사진이 인쇄된 종이를 그에게 가져왔다. 처남은 “집에 있는 유물들과 비슷한데 이게 1500만 달러에 팔렸다”며 “집에 있는 것들이 뭔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들은 곧장 집으로 달려가 유물들을 안전금고에 보관했다. 에릭은 당시 장인인 패턴과 함께 샌디에이고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친분이 있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큐레이터에게 연락했다. 에릭의 부탁을 받고 감정에 나선 이 큐레이터는 “미국에선 큰 가치가 없지만 한국으로서는 무척 귀중한 물건”이라고 전해왔다. 그 소식을 들은 뒤 3주 만인 지난해 6월 패턴이 숨졌다고 한다. 다음은 에릭과의 일문일답.

 -왜 패턴은 한국 정부나 미군에 습득물에 대해 보고하지 않았나.
 “장인은 그렇게 중요한 물건인지 몰랐다고 했다. 또 한국 정부 소유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실제로 미국에 돌아와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들 유물을 보여주면, 대다수가 ‘중국 것 같다’고 말했다고 들었다.”

 -반환한 소감은.
 “지금이라도 유물들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돼 기쁘다. 다행인 건 지난 62년 동안 장인이 보관을 잘해 유물들의 상태가 좋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 모두 아끼고 사랑했다. 장인이 아끼던 유물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아쉽다. 장인도 그게 한국의 문화재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국을 방문해 전시된 유물들을 직접 관람하고 싶다.”

 -국토안보조사부 수사팀의 연락은 언제 받았나.
 “지난 10월 초에 연락이 왔다. 돌려주려고 했지만 방법을 몰랐는데 오히려 연락을 받고 맘이 놓였다. 한국 문화재를 더 갖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美, 불법 해외유물 매매 금지
이번 수사를 맡은 이민세관단속국(ICE) 산하 국토안보조사국(HSI) 샌디에이고 지부 측과도 연락이 됐다.

 HSI 측은 “유물을 갖고 있던 가족들의 이해로 압류절차를 앞당길 수 있었다”며 “수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한국으로의 반환 절차를 밟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HSI에 따르면 이번 수사는 워싱턴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제보로 시작됐다. 미 연방법에 따르면 불법 취득한 해외 유물은 국가절도재산법에 따라 매매가 금지된다. HSI 측은 지난 10월 유물 소지자가 샌디에이고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가족에게 연락했다. 이어 지난 18일 지부 수사팀이 가족을 만나 유물을 압수했다. 수사팀은 가족들이 밝힌 유물 습득 경위를 사실로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유물들은 한국으로 반환될 때까지 ICE가 보관할 예정이다. 통상 반환 절차는 1년쯤 걸리지만 밀반입 문화재라는 사실이 확인돼 이르면 내년 상반기 중 한국에 반환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음은 수사관과의 일문일답.

 -밀반입에 대한 처벌은 없나.
 “당사자인 패턴 대령은 이미 숨졌다. 유족들은 패턴 대령까지 포함해 유물들이 한국 정부 소유이며 이를 돌려줘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유족 모두 유물들이 한국 문화재라는 사실을 안 후 반환에 협조적인 만큼 처벌은 없을 것이다.”

 -이번 사건과 비슷한 사례가 또 있나.
 “수사 중인 사안은 밝힐 수 없다. 이번 건에 대한 수사도 완전히 종결된 것이 아닌 만큼 구체적으로 말하긴 곤란하다. 이번 수사로 한국에 귀한 문화재를 돌려줄 수 있게 돼 기쁘다. 앞으로도 불법 반입된 유물은 수사를 통해 찾아내고 돌려줄 것이다.”

대한제국 선포 계기로 제작된 국새
이번에 발견된 인장 중 국새 황제지보는 1897년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를 계기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어보란 임금의 존호 등을 새긴 의례용 인장이다. 그러나 국새는 왕이나 황제가 외교문서 등에 실제로 사용한다. 이번에 압수된 유물은 고종의 국새 3점과 어보 1점, 그리고 조선왕실에서 사용됐던 개인 인장 등 총 9점이다. 문화재청은 “조선왕실과 대한제국 인장은 국가의 권위 및 국민 자긍심과 관련된 유물로 반드시 환수해야 할 문화재”라고 밝혔다. 한·미 수사 공조로 한국 문화재가 압수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로 지난 9월 조선 말의 화폐교환권인 호조태환권의 인쇄원판이 반환됐었다.

장연화 LA 중앙일보 기자 yhc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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