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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제자 윤석오|<제26화>경무대 사계(8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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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양자 선택>
이 대통령은 전쟁이 끝난 후 연만해짐에 따라 자식이 없는 것이 더욱 쓸쓸해졌다. 부모님께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이 박사는 젊은 시절에 독립운동 하느라 효도를 못하고 엄친의 임종도 못했다는 불효자책 때문에 더 그러했다.
이즈음에 나는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슬하에 자손이 없어도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이제와 생각하면 38이북에 있는 선영을 앞으로 모시는 일이 걱정이야…』하며 쓸쓸해하던 모습을 본 일이 있다.
내가 뭐라고 말할 계제는 못 됐지만 내 생각으로는 친척이 없는 어린애를 입양시켰으면 했다.
환도직후에는 의친왕의 손자로 운현궁에 살던 이종이란 중학생이 자주 경무대에 드나들었다. 그 학생의 어머니 박찬수 여사도 가끔 들어왔다.
그 당시 경무대에선 1주일에 두어 번씩 영화를 상영했는데 대통령은 이런 때면 사람을 보내 종군을 데려오도록 하고 가끔 먹을 것도 보내곤 했다.
그래서 경무대주변엔 한때 이종군이 입양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돌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어쩐 이유인지 수그러들고 만송의 큰아들 강석군의 경무대출입이 잦아졌다.
만송의 부인 박 마리아가 자주 「프란체스카」 할머니에게 데려왔다고 한다. 처음부터 아들을 양자로 주려고 계획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소년을 귀여워하는 노부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할아버지보다도 할머니가 강석이를 무척 사랑했다. 강석이가 양자로 들어온 뒤에 안일이지만 강석이의 양자 문제는 두 부인 간에 얘기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할아버지 한데는 할머니가 양자얘기를 꺼내고 남석이를 추천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스스로 양자문제를 제기하니 오히려 고맙게 여겨 만송에게 강석을 양자로 달라는 말을 꺼냈다. 만송은 장남을 어떻게 양자로 주느냐고 고민했으나 대통령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힘들고 부인 박 여사도 『그렇게 하는 게 여러 가지로 좋을 것』이라고 부추겨 입양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어찌나 비밀히 했던지 우리친척들은 입양이 선포되는 그날 아침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1957년3월26일 할아버님의 82회 탄신. 이날도 우리는 예에 따라 아침 일찍 경무대로 축하인사를 갔다.
아버님(종구)과 다른 친척은 인사만 드리고 모두 나갔고 나만 경무대에 남아있었다. 강석이도 자기부모와 경무대엘 왔는데 그저 인사하러 왔겠지 하고 단순히 생각했다.
그런데 10시 반쯤 이기붕 의장, 김병로 대법원장, 전 국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문봉제 국무위원 사무국장이 강석이를 앞자리에 세워놓고 입양선언을 한 뒤 헌수를 시켰다. 탄실절의 헌수는 55년 80회 탄신 때부터 생긴 것으로 그전까지는 3부의 대표 한 사람만이 참여했다.
강석의 헌수를 받은 이 대통령은 그의 손을 잡아 오른쪽 자리에 앉히고 양자를 둔 기쁨을 얘기했다.
『나는 6대 독자야. 어렸을 때는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지. 지금도 그 사랑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맙고 극진한 것이었는가에 다시금 감사할 수밖에 없어. 젊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으나 이제와 생각하면 38이북인 황해도 평산에 있는 선영을 위해서도 불가불 대를 이을 후손이 있어야겠어. 내가 미국서 독립운동을 할 때 지은 시를 하나 외어보지.
「십생구사 구생인
육대이문 독자신
고국청산 도유몽
선영백골 호무친」.』
「여러 차례 사경을 넘어 어렵게 산 인생, 이씨 가문의 6대 독자 몸으로, 고국의 푸른 산을 꿈속에서나 거니니, 선영의 백골을 모실 육친도 없고나」하는 비통한 뜻이다.
양자를 하게된 심경은 충분히 이해가 가나 가까운 친척에게 아무런 상의가 없었던 것이 화가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즉시 부친께 지금 양자 입양식이 거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화로 알렸다. 물론 부친도 깜짝 놀랐다.
그날오후 탄신 행사가 모두 끝난 뒤 우리 부자는 대통령을 찾아갔다. 부친이 서두를 꺼냈다.
『아저씨, 어떻게 양자를 하시어 귀한 아들을 맞이하면서 아침에 들어왔을 때 한마디 말씀이 없으셨습니까, 섭섭합니다』 『미안하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잘들 지내게.』
더 이상 무슨 얘기를 할 수 없어 시무룩한 표정만 짓고 나왔다.
이 사실이 발표되자 항간에는 『만송이 후계자가 되려고 아들까지 바쳤다』 『아무리 박 마리아의 아부도 좋지만 손행 사람을 양자로 하느냐』는 등 좋지 않은 얘기가 많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양령대군 종친회에서도 효령대군 자손을 양자로 했다고 해서 불편이 많았다.
그런데 사흘후인 3월29일 파출소를 통해 정오까지 부자가 경무대에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가보니 심종철 아저씨도 와있었다.
할아버지는 강석이와 함께 친척이 모여 식사를 같이하자고 불렀다고 했다. 이 박사 부처와 강석 그리고 우리 친척 3명이 점심을 하는 자리에서 할아버지는 자랄 때 얘기를 많이 했다. 머리를 길게 기를 때 부모님이 참빗으로 빗어주면 아파 울던 얘기 등을 하며 『이제 모두 가족이 됐으니 가깝게 지내야 해』하고 당부했다. 식사 후 대 응접실로 옮겨 차를 들면서 대통령은 『기념사진 한 장 남겨야지, 사진사 없나』해서 찍은 게 3회전인 78회에 게재했던 사진이다.
할아버지는 식사 후 『나는 바빠 같이 있을 수 없으나 자네들은 같이 하루 쉬게. 적적하면 뒷산 산보나 하지…』하고 권했다. 그러나 모두 기분이 언짢아 나와버렸다. <계속> 【우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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