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제26화 경무대사계(7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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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20 총선거>
54년에 접어들어 정계는 제3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자유·민국 양당이 각각 전당대회를 열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당공천후보제와 선거공약을 채택하는 등 선거운동채비를 서둘렀다.
새해 들어 이 박사는 여든이 됐지만 규칙적인 생활과 「마담」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건강은 퍽 좋았다.
1월23일 정부는 이른바 경제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내용은 경제관계 조항을 고쳐 중요 자원과 자연력을 국유로 하고 중요 공공사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국회토의는 찬반양론으로 엇갈렸었는데 개헌안과 공천문제가 얽혀 사정이 복잡하게 됐다. 여당인 자유당의원 가운데는 개헌안에 찬성하는 대신 공천을 보강해달라는 식으로 당 간부들에게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얘기가 이 박사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평소 여·야 할 것 없이 국회의원들이 국가이익보다는 당리나 사리만을 생각한다고 몹시 불신했던 이 박사는 이 얘기를 듣고 『개헌안 찬성과 공천을 「바터」하자는 의원이 어떤 사람들이냐』고 버럭 화를 내면서 『찾아내서 그런 사람은 공천에서 제외시키라』고 했다.
당시 자유당의 세력이 방대했으므로 자유당 공천만 받으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은 훨씬 수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그만큼 공천경합도 심했다. 이런 연유까지 겹쳐 이 박사는 국회를 아주 못 마땅해 했다.
그런 속에서 정부는 2대 국회의 임기도 얼마 남지 않았고 미비한 점도 있고 하니 경제개헌안은 관련된 법안과 함께 다음 국회에 새로 내놓겠다고 자진 철회했다.
개헌안을 철회한 바로 다음날인 3월11일 이 박사는 국회와 국회의원들을 비난하는 담화를 냈다.
『…혹 세력이나 재력을 가지고 어디든지 가서 사람을 속여서 그네들을 대표하겠으니 선거하여 달라고 하는 것은 대표라는 명사와도 틀리고 또 실제상 지방의 이익을 돌아볼 여가도 없는 것이다.
우리 국회의원들이 아직까지는 공심보다 사심이 더 중해서 오직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들만이 다시 피선되는 것만 국회의원의 방책으로 알고 있으므로 이 위급할 때에 국사가 이 정도에 이른 것은 참 통탄할 일이다….』
이 박사는 국회가 선거법개정안을 심의할 때 연고가 있는 사람만이 입후보하게 하고 선거의 타락을 막고 돈은 없으나 인격을 갖춘 어진 사람이 선출되도록 선거비용을 제한하도록 요청했던 것이다.
결국 국회가 연고주의를 완화해서 선거법을 통과시키자 『이것 한가지만 가지고 보더라도 이 국회의원 중에는 다시 피선될 자격자가 몇 사람이 못되는 줄로 안다』고 담화까지 냈다.
이 박사는 또 『지난 4년 동안에 정부에서 속박을 받고 앉아서 할 일도 못하고 안 할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나 참고 내려온 것이니 이번에 또 나라관계를 무시하는 사람을 뽑아서 이와 같이 또 된다면 우리 민주정치는 앞길이 대단히 망창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도무지 국회의원들이 국사와는 거리가 멀고 당리와 사리만을 추구한다고 했고 그 때문에 자유당소속의원이라도 현직의원의 공천은 재고하라고 지시했다. 공천과정에서 이 박사는 친공분자는 물론 일제 때의 친일실업인 등은 국회의원에 공천해서는 안 된다고 누차 강조했다.
이 박사는 3월21일 다시 국회의원선거에 관한 담화를 발표, 『…자유당에 들어가서 선거나 되면 사리사욕만을 채우겠다는 그런 비루한 생각을 가진 자는 당초 그 과거에 행한 역사로 보아 알거니와 수효에도 치지 말고…그 중에도 주의할 것은 일제 때 권리와 재산을 얻은 자들은 일체 배제하고…또 공산이나 친공하는 자들은 우리가 다 아는 고로 누가 그런 자들에게 투표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아니 되며…』라고 했다.
이 말썽 많은 자유당 공천에 우연히 내가 끼여들었다.
그날은 일요일인데 마침 내가 당직이어서 경무대에 나와있었다. 오후가 되니 대통령으로부터 2층으로 올라오라는 전갈이 왔다.
이대통령은 서류를 꺼내 내게 주면서 『자유당에서 공천후보라고 내게 가져왔어. 이걸 가지고 가 과거에 나쁜 짓 한 사람이나 사업하는 사람을 골라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는 즉시 김장흥 총경을 나오라고 해 일일이 명단을 「체크」했다. 나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김 총경은 더욱 이일을 꺼려했다. 그와는 사전에 자유당이 협의를 한 듯했다.
대통령의 지시대로 사업하는 사람과 일제 때 친일파로 지목되던 사람 7명을 골라 대통령께 보고했다. 이대통령은 이 7명을 골라내고 공천을 승인했다.
최후단계에서 공천예정자가 빠져버리니 자유당 간부들은 무척 난처해졌다. 만송(이기붕)이 불쾌해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래저래 나만 미움을 받게됐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공천을 하고도 이 박사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선거를 20여일 앞두고 개헌을 다짐하는 담화를 냈다.
『내가 누차 강조한 개헌문제에 찬성한다는 다짐을 받고 입후보케 하고 나중 당선된 뒤에라도 민의를 위반하고 딴 일을 하면 소환한다는 조건을 붙여 투표해 주어야 한다.』
드디어 5월20일 제3대 민의원선거가 실시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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