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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제26화>경무대사계(48)황규면<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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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울탈환까지>
부산 피란 시절의 대통령관저는 경남 도청 뒤에 자리잡은 지사관사였다. 이대통령은 이 지사관사의 조그마한 방에서 집무했다.
너무도 초라한 집무실이어서 우리비서들이 민망할 정도였다.
더우기 화장실이 재래의 한국식이어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 양식이 한국식일 뿐 아니라 수세식이 아니어서 한번 사용하고 나면 회를 뿌려야했다.
우리는 몇 번이고 화장실만은 고쳤으면 했지만 이대통령은 고치라는 지시를 하지 않았다.
비서 진에선 관저의 부분적인 손질을 생각해 봤지만 그때마다 이 박사는『어려운 때 참고 견딜 줄을 알아야 하는 거야』라고 오히려 격려하곤 해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전쟁중의 정부엔 일이 밀렸다. 병력동원, 군의 재편, 사회질서 확립, 피란 민의 구호 등….
경무대 그 무렵의 비서 진은 이런 방대한 일을 파악해서 대통령을 충실히 보필하기엔 인원도 적고 장비도 없고 사무실마저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형편이었다.
이 무렵 대통령의 머리엔 전쟁수행이라는 것 밖에 없는 듯 했다. 이 박사는 사흘이 멀다하고 전선시찰을 했고 틈만 나면 피란민 수용소를 「마담」과 함께 방문해서 난민들을 위로하고 구호상황을 살피곤 했다.
「유엔」안보리가 「유엔」군을 파한 키로 결정한 후 미군이외에 영국·호주·「뉴질랜드」·「터키」·「캐나다」·「필리핀」·태국 등 우방 16개국의 군대가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우기 위해 속속 부산에 도착했다.
이 박사는「유엔」군이 올 때마다 직접 부산부두에 나가 장병들을 환영했다.
또한 장병들이 일선으로 떠날 때도 직접 「마담」과 함께 환송을 해주며 장병들을 격려했다.
처음 부산 피란 후 이 박사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쌍방이 일진일퇴를 거듭 할 때는 상당히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전황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교착상태에 빠졌던 50년8월19일 미 육군 참모총장「콜린즈」장군과 해국작전부장 「셔먼」제독이 「워싱턴」에서 동경「맥아더」사령부를 방문하고, 22일엔 한국전선을 시찰한 후 현지 군 지휘관들과 일련의 군사회의를 열었었다. 이 회의에서 한국 전쟁 사에 길이 남을 인천 상륙 작전이 논의됐다.
이 극비 상륙 작전은 이대통령에게만 사전에 보고 됐었다. 우리는 우울해하던 이박사가 9월에 접어들면서 몰라보게 명랑해진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후일에야 인천 상륙 작전 계획을 보고 받고 전세를 쉽게 돌려놓게 되었다는 확신을 갖게된 탓임을 알았다.
그러나 전세는 낙동강 전선을 뚫기 위한 북괴군의 총공세를 앞둔 때여서 긴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러던 중 9월12일 「워커」 8군사령관은 더할 수 없이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북괴군의 총공세는「유엔」군의 반격으로 모두 꺾었으며 이제 북괴군으로서는 낙동강전선돌파를 기도해 볼 능력을 상실해서 『최대의 위기는 지나갔다』는 것이었다.
곧이어 15일 「유엔」군은 역사적인 인천 상륙 작전을 단행했다.
이날 저녁 6시 한·미 해병대는 비 내리는 인천 월미도에 상륙을 개시했다.
4백 척의 상륙용 주정이 네 번에 걸쳐 파상 적으로 상륙, 교두보를 구축했다.
이 작전에는 한국함정 15척, 미 함정 2백26척, 그리고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프랑스」등 6개국 함정 20척 등 모두 2백61척이 참가했으며 미 해군소장「도일」장군이 지휘하고 「맥아더」「유엔」군사령관이 독전했다.
이 작전은 월미도점령―인천반도확보―서울수복의 3단계로 진행됐다.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이 전해지자 부산에 있던 이대통령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 박사는『「유엔」군 총 사령관 「맥아더」장군에게 훈장을 주어야겠다』면서 준비를 서두르라고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부산시내를 다 뒤져보아도「맥아더」원수에게 수여할 건국공로훈장에 적합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 연락하여 급히 견장 등을 구해보내도록 해야했다.
인천 상륙 작전의 승전「뉴스」가 전해지자 부산역전에서는 수도돌입 축하식과 인천 상륙 축하회가 베풀어졌고 20일에는 「맥아더」사령관이 직접 전선을 시찰, 독려하는 가운데 국군과 「유엔」군 주력부대가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공방전을 개시했다.
이때 괴뢰군은 이른바 민족 보위 상이던 최용건을 서울방위사령관에 임명하고 최후 저항을 하는 한편 수많은 애국자와 부녀자들을 납치하고 학살했다.
25일에는 북괴군이 개전 이래 최대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미제1해병사단은 이날아침 덕수궁에 도달했고, 같은 시간에 한강을 건넌 미제7보병사단은 남산을 탈환했으며, 26일 정오 한국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높이 달았다.
6월28일 중앙청에서 태극기가 내려진 날로부터 90일간의 암흑기가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28일 서울이 완전 수복되자 「알루미늄」합금으로 된 부교가 마포에 가설됐다.
「맥아더」장군은 서울이 탈환되자 지체없이 부산수영비행장으로 「콘스털레이션」을 보내주었다.
이 비행기엔 이대통령 이외에 조봉암 국회부의장, 김병노 대법원장이 동승했다. 말하자면 입법·사법부의 장이 대통령과 함께 서울수복과 수도 환도 식에 참석하러 떠나게 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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