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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제26화><경무대 사계>(46)황규면<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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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구천도>
이대통령이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 우리는 신 국방장관으로부터 한강방위선이 무너져 공산군이 수원을 향해 물밀 듯 내려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미24사단의 선발대인「스미드」기동부대가 서정리 북쪽죽미령에서 미34연대가 평택과 천안에서 각기 붕괴된 소식을 들은 것도 부산에서다.
한편 우리가 7월1일 새벽3시 비밀리에 피란을 떠나자 대전은 대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총무처장 전규홍 박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정부요인과 국회의원들은 이날아침 대전 역으로 모였다.
대전 역에 모인 요인들은 대통령을 따라 전주로 가야하느니, 대구로 가야하느니 우왕좌왕하다가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대부분이 기차를 타고 전주로 갔으나 대구 쪽으로 온 사람도 많았다.
전주로 간 사람들은 대통령의 행방을 찾을 수 없고 사태도 별로 긴박하지 않다는 소식이 전해져 대부분 대전으로 되돌아갔다. 우리와 따로 떨어져있던 고재봉·김광섭씨도 마찬가지다.
이 소동이 있은 후로는 국무위원들은 정확한 전황정보를 빨리 교환하기 위해 하루에 두 번씩 간담회를 열었다.
개원한지 1주일만에 피란 길에 나서게 된 국회의원들도 4일 충남도청에서 비상국회를 소집하고 신익희 의장직권으로 국회외교군사비상위원회를 설치했다. 비상 위의 「멤버」는 지청천 서민호 김종회 황성수 이용설 김용우의원 등으로 짜여졌다.
비상 위의 임무래야 행정부와 미대사관에 전황정보를 알아보는게 고작이었다.
전투는 계속 불리하게 전개됐지만 7월7일「유엔」안보리가 회원국에 대해 미국의 통솔 하에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하도록 권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유엔」군 총사령관에는 「맥아더」장군이 임명됐다.
초기의 무질서와 혼돈에서 약간 안정을 얻게 된 정부는 이대통령의 전화 재가를 얻어 7월8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6·25이후 사실상 행해졌던 계엄사태가 2주일이 지난 뒤에야 추인 된 것만 보아도 그 당시 우리관민이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주일간 부산에 머물렀던 이 박사는 임시수도 대전과 너무 멀어 시원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고 지휘할 수 없다고 불만이 컸다. 결국 이 박사와 우리는 7월9일 다시 대구로 올라갔다. 우리가 탄 기차는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역력하게 보여주었다. 차체며 차창이며 온통 총상투성이인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간 것이다. 조재천 경북도지사관사에 좌정 했다.
「유엔」군 총사령관이 된 「맥아더」장군은 13일 8군사령관 「워커」중장에게 한국 안의 모든 미 지상군의 작전지휘권을 부여했다. 이대통령도 작전의 능률을 위해 7월14일 「맥아더」원수에게 『전쟁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한국군도 함께 지휘해주기 바란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으로 한국군의 작전 권은 「유엔」군사령관에게 위임된 것이다.
미 지상군의 지휘권을 인수한 「워커」중장은 공산군을 금강 선에서 저지할 생각이었다. 신 국방장관도 입버릇처럼 『대전을 사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 금강방어선이 무너졌다. 드디어 대전에서 버티던 정부요인들은 16일 임시수도를 대구로 옮겼다. 공산군 3개 사단의 총공격을 받은 미24사단은 혈투 끝에 20일 대전에서 물러났다. 이때 행방불명이 된 24사단장 「딘」소장은 한달 여를 피신한 끝에 8월25일 적에게 포로가 된다.
정부가 대구로 옮기기 직전 이대통령은 전시 속의 내무장관경질을 단행했다. 당시 전세도 말이 아니었지만 치안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더우기 군사정세에 대한 정보가 어두워 경찰은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백성욱 내무장관은 어디에서 무슨 일부터 착수해야 할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전쟁에 투입된 미군사령관들은 무질서한 치안이 작전수행에 지장을 가져오고 있다고 불평했다.
이런 어려운 때 유석(조병옥 박사)은 대단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는 전쟁이 터진 날 아침 경무대를 찾아왔고 피란 중 대전에서 민국당·국민회·부인회·대한청년단 등 사회 각 단체지도자들을 규합하여 「구국총력연맹」을 결성했다. 유석은 이 연맹위원장을 맡아 민심을 안정시키고 전쟁수행을 위한 「팸플릿」잡지발간을 하는 한편 지방유세에 나서고 있었다.
이 무렵 대전시청에 자리잡고 있던 피란 정부에는 이대통령이 주재하는 전국 평정 회가 있었다.
이 회의에는 미군사령관도 때로 참석해서 전황설명도 하고 필요한 지원요청도 했었다.
이 무렵 어느 때의 전국 평정 회인데 「윌리엄·딘」소장이 『우리 미국정부 각료들이 북괴의 남침에 대해 「닥터」조와 같은 선견지명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무방비상태로 재난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미군의 보다 효과적인 작전수행을 위해선 한국정부가 하루속히 치안질서를 확립해주어야겠다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다.
유석은 대통령특사로 미국에 가서 군 원 교섭도 했고 군정에서 일해 미 극동군의 고급장교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이런 점까지 고려해 이 대통령은 유석을 내무장관으로 기용하기로 해서 당시 총리서리였던 신성모씨에게 『유석을 만나면 내게 오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마침 유석은 지방유세 중이어서 연락이 닿지 않다가 7월13일에야 유석이 대전에 돌아와 신 총리서리를 만나게됐다.
신 총리서리는 유석을 만나 이 대통령께서 기다리고있다고 이르고 아마 유석더러 내무장관을 맡아달라고 할 것 같다는 것까지 귀띔해 주었다.
다음날 유석은 이 박사를 만났다. 이 대통령은 유석으로부터 지방실정을 들은 뒤 곧 내무장관을 맡으라고 했고 유석도 즉석에서 수락해 내무장관경질이 이루어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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