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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부채질한「직접통치」선언 북 에이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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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신·구교도간의 유혈종교분쟁사태로 인해 파국직전에 처했던 북「에이레」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히드」영국수상이 최후의 수단으로 향후 1년간 북「에이레」의회와 정부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북「에이레」에 대해 직접통치권을 행사할 것을 발표했다. 이로서 북「에이레」는 52년만에 다시 영국의 직접 지배하에 놓이게되고 1920년 북「에이레」정부 법에 보장된 이 지역의 자치권은 일시 보류되었다.
영국정부는 동법75조에 규정된 『자치권의 일시적 보류는 국권의 최고기관으로서 영국의회의 권위에 위배되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원용함으로써 자치령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최후의 「전가의 실력」를 휘두른 셈이다.
이미 69년8월과 70년6월에 대규모의 폭동으로 내란의 위기로까지 몰고 갔던 이 분쟁은 표면상으로는 다수파 「프로테스탄트」(신교)계주 민과 소수「가톨릭」주민사이의 종교분규로 알려지고 있으나, 실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차별을 받고있는 「에이레」계 주민들의 울분이 심층에 깔려있다.
북「에이레」가 1921년 영국의 지방자치정부로서 발족한 후 내각과 의회의 모든 요직이 신교도의 차지로 돌아가자, 「가톨릭」교도들은 68년 헌법개정에 따른 공평한 정치참여·교육·취업·주택의 보장을 요구하는 민권운동을 격화시켜왔다.
정치적인 차별은 투표권행사에서 두드러졌다. 부동산세를 납부하는 유권자, 즉 집을 소유하고있는 사람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져 빈민이 많은 「가톨릭」계 주민에겐 사실상 정치참여의 길이 제한되고, 경제권은 대부분 신교도들이 쥐고있기 때문에 「가톨릭」계 주민에 대한 차별대우가 개선될 전망도 밝지 못했다.
한편 88%의 국민이 「가톨릭」계인 남「에이레」정부가 동북쪽「에이레」주민에게 동정을 표시하게 되고, 「가톨릭」과격파 비밀군사단체인 「에이레」공화 국군(IRA)이 무력행사를 격화시키자 사태는 영국의 직접개입으로 발전했다.
「히드」수상이 이번에 다수파신교도들의 비판을 각오하고 직접통치란 획기적 조처를 취하게 된 이면에는 「포크너」 북「에이레」수상의 정부에 대한 영국의 불만과 불신이 크게 작용했다.
「포크너」수상은 지난여름 「히드」수상을 졸라 예방금고법의 실시를 승인 받았다. 그러나 치안유지라는 목적은 아랑곳없이 유혈소동을 격화되기만 했고 「포크너」수상은 이를 「가톨릭」과격분자의 탄압에 일방적으로 이용해 왔다.
「가톨릭」교도 13명이 살해된 소위 「피의 일요일」을 보고 영국공정대가 『저격 자에 대한 적대행위냐 부고한 「데모」군중들에 대한 발포행위냐』라고 힐난했었을 때「히드」수상의 충격은 극도에 달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에드워드·케네디」상원의원이 북「에이레」사태를 『영국의 월남전』에 비유, 비난하는가 하면, 「린지」「뉴요크」시장이 「피의 일요일」의 희생자들을 조위 하는 상장을 달기에 이르자 영국은 세계「가톨릭」사회로부터 적대시될 만큼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하는「윌슨」노동당수의 6개항제안이 있었다. 결국 「히드」수상은 「포크너」 북「에이레」수상을 불러 보수당정책의 테두리 안에서 3개 기본해결방안을 제시했다.
①예방금고법의 단계적 철폐 ②남북「에이레」통일문제에 관한 국민투표의 실시 ③치안유지의 책임과 권한을 전적으로 영국정부에 이관할 것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대해 「포크너」는 ① ②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③은 북「에이레」의 자치원칙을 들어 반대, 만약 강요당하면 내각이 총 사퇴하겠다고 통고했다.
「포크너」내각의 총 사퇴는 북「에이레」신교도들의 「히드」정권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볼 수 있다.
27일 18만 명으로 추산되는 신 교도계 노동자들은 곧 호전적인 반영단체가 선호하는 2일간의 총파업 호소에 호응, 정국은 새로운 위기로 치닫고 있다.
「포크너」는 영국으로부터 북「에이레」의 기본적성격의 변화가 강요된다면 신교도과격파로부터 유례없는 반격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영국의 직접통치를 규탄하고 나섰다.
이번 영국의 「직접통치」 선언에 대해 신교도들은 대다수가 백안시하는 반응을 보였고, 「가톨릭」계 주민들은 과격파를 제외하고는 일단 환영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 동안 영국은 북「에이레」 분쟁에서는 일단은 과격파 「가톨릭」교도들의 「데모」를 진압하는 것으로 사태의 미봉책은 될 수 있었으나, 앞으로는 신교도들의 「등뒤로부터의 적」을 포함한 쌍방의 과격파를 선무해야 하는 이중고를 목초한 셈이다. 여기에 영국의 「직접통치」에 대한 잠복 적인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으며 실로 그 전도를 불안케 하는 암영이 깔려있다.
앞으로의 문제는 직접통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한 영국의 북「에이레」에 대한 정치·경제·사회면의 개혁의 양과 질이다.
그것은 곧 황폐화한 북「에이레」의 경제건설을 위해 영국이 어느 만큼 자본을 투입하고, 「가톨릭」계 주민에 대한 차별행정조치를 철폐해 주느냐에 달려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전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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