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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모으는 철가방 두니, 벤치가 도서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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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8일 학생들이 광주광역시청 근처 벤치 위 철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고 있다. 광주에는 이런 벤치가 70~80개 있다. [프리랜서 오종찬]

18일 오후 광주광역시청 앞 버스 정류장 앞 벤치. 뚜껑에 ‘책을 본 다음 꼭 제자리에 돌려 주세요’라 적힌 중국집 철가방이 한쪽에 놓여 있다. 열어보니 속에 시집과 시사주간지·월간지 등 책 6권이 들어 있다. 벤치에서 시집을 읽던 고교생 오건(18)군은 “전에는 버스를 기다리며 벤치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지만 요즘은 시를 읽는다”고 말했다.

 이는 광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 지난 9월 처음 등장한 ‘책 읽는 벤치 in 광주(이하 책벤)’다. 도심 벤치에 책 둘 곳을 마련하고 다 읽은 책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도심 벤치 70~80개가 ‘미니 공공 도서관’으로 탈바꿈했다.

 처음 아이디어를 낸 이는 전남대 대학원생인 탁아림(25·여)씨다. 탁씨는 “인터넷을 통해 네덜란드 ‘루일방크(ruilbank) 프로젝트’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다. 루일방크란 공원 벤치에 커다란 클립을 설치하고 여기에 다 읽은 잡지나 책을 꽂아두어 아무나 와서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 ‘루일(ruil)’이란 네덜란드어로 ‘교환’이란 뜻이란다.

 탁씨는 전남대 캠퍼스에 1호 책벤을 만들어 사진집을 꽂아 뒀다. 이후 책벤은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 번졌다. 현재 정기적으로 책을 갖다 두고 가끔씩 책이 없어졌는지 점검 등을 하는 ‘책벤지기’가 110여 명에 이른다. 전화나 페이스북을 통해 탁씨에게 연락해 등록을 한 이들이다. 대부분 집 근처 등 가기 편한 곳에 책벤을 만들어 관리한다. 대학생·교사·공무원·주부에 연령도 6세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벤치에 놓인 책꽂이 또한 가지각색이다. 바구니를 비롯해 미니책장·플라스틱통에 철가방까지 등장했다. 최근에는 벤치에 앉아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적을 수 있도록 메모장·펜을 비치한 곳이 생겼다.

 책벤지기에게 날씨를 미리 알려주는 ‘책벤 캐스터’까지 등장했다. 캐스터가 책벤지기들에게 비 소식을 퍼뜨리면 책벤지기들은 책을 거둬들이거나 지퍼백에 넣어놓는다. 최근에는 서울·부산·대구 등 타 지역에서도 책벤을 열겠다며 운영 노하우를 가르쳐 달라는 연락이 온다고 한다.

 광주에서는 다음 달부터 내년 2월까지는 운영을 중단하기로 했다. 날씨가 춥고 눈까지 오면 책을 관리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탁씨는 “책벤은 나에겐 필요없지만 누군가에겐 필요한 것을 나누는 기부이자, 시민들이 서로 교감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공유 프로젝트”라고 말했다.

광주=장대석 기자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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