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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육성한다며 규제" … 힘의 논리보다 이해·소통 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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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1월까지 시행이 유예 중인 시장형 실거래가제도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토론회가 지난 6일 개최됐다. [사진 한국제약협회]

“우리 제약업계도 신약개발을 위한 R&D 투자를 늘리고, 글로벌 시장을 제대로 하고싶다. 하지만 제약산업을 육성·지원하겠다며 정작 투자 여력을 계속 빼앗는 약가정책만 내놓으니 우리 보고 제약업을 접으라는 것이냐.”

 국내 제약업계가 뿔 났다. ‘2020년 세계 7대 제약강국 도약’ ‘글로벌 신약 4개 이상 개발’ 등 제약산업의 비전에 대한 정부의 다짐은 화려하지만 뒤따라야할 구체적 실행 노력은 보이지않고 이중삼중 약가인하 정책만 쏟아지기 때문이다. 지난 7월 보건복지부가 제약산업 육성지원 5개년계획을 내놓아 나름대로 기대를 했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건강보험 재정 절감의 주요 수단으로 이중삼중 약가인하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특히 복지부가 내년 1월까지 시행유예중인 시장형 실거래가제(저가구매 인센티브제)의 재시행까지 검토한다는 사실에 절망감마저 느끼는 분위기다. 왜 어떤 이유로 이 제도가 보건의료계의 뜨거운 현안이 되는 것일까.

 시장형 실거래가제도는 병원과 약국 등 요양기관이 의약품을 건강보험에 규정된 가격보다 싸게 구매하면 그 차액의 70%를 인센티브로 요양기관에 지급하는 제도다. 약을 싸게 구입하면 할수록 인센티브가 많아지므로 저가구매 인센티브제도라고도 한다. 이렇게 가격이 내린 의약품은 다음해 그만큼 보험약가가 내려 간다.

 이 제도는 2010년 10월부터 2012년 1월까지 16개월간 시행되었지만 지난해 일괄 약가인하 등으로 제약산업이 입을 피해를 고려해 2012년 2월부터 내년 1월까지 2년간 시행이 유예된 상태다. 그런데 복지부가 내년 2월부터 이 제도의 시행 여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형 실거래가제에 대해서는 한국제약협회와 대한약사회, 의사협회와 도매협회 등은 물론 시민사회단체에서도 한목소리로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제약협회는 한마디로 장·단점을 논의하기에 앞서 시장형 실거래가제는 이미 정책시행의 목표 달성 가능성과 정당성이 사라졌다는 입장이다. 제도를 시행할 당시인 2010년 약가와 유통 투명성 등의 상황과 2013년 현재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논거에 따른 것이다. 2010년 당시 100%이던 약값은 2012년 4월 일괄 약가인하와 2011년 이후 3년간 건강보험에 등재된 보험의약품의 목록 재정비에 따른 약가인하 등으로 그 절반(53.55%) 수준으로 완전히 떨어진 상태다. 앞으로 출시될 의약품 역시 특허만료 뒤 역시 동일한 53.55% 수준으로 떨어지도록 한 약가제도가 작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일괄 약가인하와 기등재 목록정비 등으로 지난 3년 사이에 2조5000억 원 상당의 약가가 인하됐다는 것이 제약협회 측의 설명이다.

 이경호 한국제약협회 회장은 지난 6일 열린 시장형 실거래가제도 관련 토론회에서 “이미 다른 제도를 통해 정책목표를 달성한 제도는 폐기하는 것이 당당한 자세”라며 “제약산업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신약개발을 위한 R&D에 투자해야할 돈, 즉 글로벌 진출을 위해 활용해야할 재원이 병원의 인센티브로 지급되는 본질을 외면해선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당시 토론회에서 이재현 성균관대 교수는 주제 발표를 통해 시장형 실거래가제 시행기간 중 지급된 전체 인센티브 2399억원 중 91.7%인 2143억 원이 대형병원에 지급됐고, 병원은 6.4%, 의원은 1.7%, 약국은 0.1%에 지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종합병원 등 대형병원에 대한 음성적인 리베이트를 합법화해준 것과 마찬가지 결과라는 지적이었다.

 토론회에서는 이 제도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가 표출됐다. 박정관 한국의약품도매협회 이사는 “시장형 실거래가제를 내년부터 다시 시행하겠다는 것은 칼자루를 쥔 슈퍼 갑에게 권총을 한 자루 더 얹어주려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폐지를 촉구했다.“정부의 태도를 보면 마치 사각의 링에, 그것도 못 빠져나가게 바닥에 자갈을 깔아놓은 그곳에 초등학생(제약회사)와 대학생(대형병원)을 밀어 넣어놓고 싸움을 붙이려는 모습이 연상된다”는 김대원 한국약사회 부회장의 거센 비판도 있었다. 이석준 변호사(법무법인 율촌)는 “ 약가의 적정성을 전혀 고려하지않고 무조건 약가를 인하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정책수단으로서 부적절하다”면서 “제약사가 병원에 주는 것은 리베이트이고, 정부가 주는 것은 리베이트가 아니냐”고 반문 했다. 한 참석자는“제약회사가 R&D 투자도 하고, 해외진출로 몸부림치는데 그것을 정부가‘제약회사가 아직도 저런 투자를 하니 살만한가 보다’하고 또 약가인하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은 너무 심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반면 정부 측 참석자는 여전히 제도의 재시행 필요성에 무게를 실었다. 신봉춘 복지부 보험약제과 사무관은 “시장형 실거래가에 대한 관련 단체 및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고, 공정한 의약품 거래 관행의 정착, 제약산업의 발전,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 등을 고려해 보건의료와 제약산업이 공생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또 김선동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기획부장은 “시장형 실거래가 제도하에서 요양기관이 의약품을 구입할 때 시장기전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일부 문제점을 보완·수정해서 발전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토론회 이후에도 제약업계 CEO들이 시장형 실거래가제의 폐지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파문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복지부는 늦어도 올해 안에 이 제도의 재시행 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려야하는 상황이다. 제약산업이 대한민국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제약산업 세계 7대 강국의 야심찬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의료계·제약업계의 협력과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이 전문가의 지적이다. 시장형 실거래가를 둘러싼 갈등과 반목을 갑을의 힘의 논리가 아닌 상호 이해와 소통으로 해결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류장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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