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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제26화 경무대 사계(2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고독한 시객>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자 국회일각에선 내각 개편론이 일고 백범의 한독당은 또다시 외군철퇴를 주장하고 나섰다.
백범의 생각은 모든 외국군대를 철퇴시키고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이번 사건보다 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반란 수습책을 세우기 위해 긴급 소집된 비상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요즘 이 난국수습에 앞장서야할 국회는 오히려 이일을 빙자하여 정부를 공격하고, 남북협상을 하자던 사람들은 반란이 자기네들 이익이라도 되는 양 외군철퇴라는 잠꼬대를 연발하고 있읍네다. 그렇지 않아도 반도들의 만행으로 온 국민이 공포에 떨고있는 이때 정국의 파동을 일삼는다면 이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야』고 말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국무총리 철기는 국회본회의에서 『이번 반란사건의 책임을 정부가 지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나 전적인 책임을 지기에는 정권인계를 받은 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그러나 이 답변에 반발한 국회의원들은 더욱 대 정부공세에 열을 올렸다.
이러한 국회의 대 정부공세는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의원들의 조각에서 빠진 불만도 가세했던 게 사실이다.
이로 인해 정부와 국회는 팽팽하게 대립했으나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만에 책임을 지라는 것은 무리』라는 대통령의 태도는 강경했다.
대통령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은 상당수의 의원들은 백범의 외군철퇴 담화에 힘입어 외군철퇴에 관한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동의안은 박종남의원 등 47명이 서명했다.
대통령은 국회의장인 해공(신익희)에게 양군철퇴안을 부결해주도록 부탁했다. 결국 이 동의안은 일단 보류했다가 폐기됐다.
오히려 국회는 11월21일 「유엔」각 국의 압력에 따라 미국정부가 미군을 철수할 징조가보이자 대통령의 권유로 미군 계속주둔결의안을 의결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23일 미군의 점진적인 철수를 발표하고 연말부터 철수를 개시했다.
그 당시 미군의 철수는 신생대한민국이 「유엔」의 승인을 받는 전제조건 비슷한 것이었다. 미군철수가 발표되자 「유엔」의 분위기도 「스무드」해져 대한민국은 12월12일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승인을 받았다.
건국초기의 파란 많던 기간 중에도 이 박사는 경무대 정원과 뜨락을 산책하며 한시를 많이 지었다.
늦가을에 지는 낙엽을 보고 이 박사는 이렇게 읊었다.
수수서풍어만단 누중원객동수안
야청용슬창전우 조견분명류외산
월색난번허백리 추광산적담황간
소계자족공취서 잉득초동반일한
(서풍은 나무들을 하도나 울려 누안의 먼 나그네 시름겨워라. 밤이자 창 앞엔 비가 우수수 하룻새 버들 밖의 산이 보여라. 휘영청 달빛은 유난히 밝고 누름한 그 잎에 가을이 흩어. 뜨락을 쓸어서 밥을 지으니 나무꾼 아인 반나절 틈이 생겼네.)
또 전문이 기억은 나지 않으나 『경무대전월 의연사구시』(경무대에서 보이는 달은 그 옛날과 같구려)라고 읊조리던 일도 생각난다.
한시는 주로 저녁에 지어 아침에 내게 보이면서 강평을 해 달래곤 했다. 글자를 한 두 개씩 고쳐드리면 다시 읽어보고 『그래 그래, 그게 더 좋겠군』하시던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가을이 깊어져 경무대 등산에 있는 상수리나무에 도토리가 열린 것을 보고 『저거 묵을 해먹으면 좋지』하고 혼잣말처럼 하신 일이 있다. 그래서 순경들을 시켜 조금만 따오도록 해 집사람이 묵을 만들어 드렸다.
그 날 저녁 대통령내외분이 아래채에 있는 우리집까지 오셔서 고맙다고 치하를 해 안절부절 했던 일이 생각난다.
내가 경무대에서 살 때 셋째 아들을 낳았다.
이 말씀을 들은 대통령은 나를 불러 축하를 하면서 『자네는 아들이 많은데 나는 아들이 없군. 저 사람이 애를 못 낳으니 색시나 하나 얻어 아들을 볼까』하고 「마담」을 보며 농담을 했다. 얘기를 하는 식이 하도 우스워 「마담」과 나는 깔깔 웃고 말았는데 대통령은 가끔 자식이 없는 것을 쓸쓸해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을 무척 귀여워해 우리 애들도 경무대에 살 때는 대통령으로부터 장난감도 선물 받곤 했다.
이 박사는 망명 전 박승선 전 부인과의 사이에 태산이라는 아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이 박사 척손인 우제하씨한테 들은 적이 있다. 이 아들은 이 박사가 「하와이」로 망명한 뒤 선교사 편에 데려갔는데 미국에서 14살 때 홍역을 앓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자기도 망명하느라 조상을 못 모셨는데 자손이 없어 조상 뵐 면목이 없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후에 양자문제가 정치와 얽혀 묘하게 되어가지만 이때부터도 양자의 필요성을 두 분이 느끼고 있었다. 한때는 대통령이 지뢰를 발견한 소년을 하도 귀여워해 그 애를 양자 삼는게 아니냐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계속> [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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