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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동아주도권의 향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닉슨」의 북경방문은 일면 『과거로의 여로』였다.
「닉슨」·주 「코뮤니케」의 진수로 드러난 미국의 중공에 대한 보다 밀접하고 호혜적인 정책은 1949년 말부터 1950년 초에 걸친 미국의 대 중공정책과 같은 것이다. 1950년6월까지만 해도 미국은 대만을 중국의 1개 성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해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대한군원이 미국의 국내정책으로 채택되자 미국은 장개석 정부의 방위에 나섰던 것이다.
이제 미국은 대만으로부터의 점진적인 철수를 약속하고 그 성격이 어떻게 변모했든 간에 1954년에 체결한 미·중 상호방위조약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로 중공과 합의했다.
미·중공간의 문제 중에서, 대만을 위한 미국의 군사개입을 정당화해준 대만의 지위에 관해 미국이 일방적으로 유보하는데 중공이 반대하는 것 이상 중요한 문제는 없다. 그러나 어떤 중공의 지도자들도 최소한 이 문제의 해결보다 낮은 대가로는 미국과의 정상관계를 가지려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닉슨」의 이번 방문자체는 작년 7월 그의 방문계획 발표보다는 「아시아」에서의 다극화 관계에서 의미하는 바가 적다.
작년 「키신저」의 1차 북경방문은 이미 미국이 마침내 중·소 관계의 현실을 간파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와서 분명히 그렇지 않다는 확증으로서 용인되기는 했지만,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중공이 소련의 위성국이라는 오판 하에 중공을 다루어 왔다.
중공과 인도사이에 분쟁이 격화되었던 1962년5월에야 미국은 그들의 중공 관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기 시작하고 중국의 공산주의가 민족주의적인가의 여부는 제쳐놓고, 중국대륙에서 공산당을 축출하려는 희망을 부분적으로 포기하는 변화를 보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미국이 잘못된 그들의 중공 관을 청산하고 중공의 대 소 정책을 비롯한 대외정책의 실체를 받아들인 것은 1968년 월남전에서의 미국의 좌절과 1969년 중·소 국경분쟁이 일어난 이후였다.
이번 「코뮤니케」에서 소련을 의식하고 막연하게나마 양국이 합의한 사항은 단 한 문장으로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어느 세력권의 나라도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닉슨」과 주가 소련에 대해 이와 같이 완곡하게 표현한데는 각각 자기대로의 계산이 있은 것이다.
미국은 국내경제 사정으로 보나 정치적인 면에서나 올해 소련과 맞대어서 해결해야할 전략무기 제한회담(SALT)의 타결가능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으며, 중공이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것은 곧 미국의 영향력에 굴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외에도 중공지도자로서는 어떤 다른 정치적 고려로 인해 어떤 초강대국에 의존할 것을 진지하게 제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필자의 생각으로는 최근의 중공지도부의 변화는 대외정책의 변혁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앞으로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아시아」에서의 강대국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대한 위험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은 것은 이 지역에서 장차 맡을 일본의 역할에 대해미국이 모호한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다.
중공은 항상 일본을 불신해 왔다. 현재 중공은 미·일 동맹이 근본적으로 반 중공적인 것이 아니라는 미국의 부인은 믿으려 하지 않고, 일본과 소련의 공모도 두려워하기 시작하고 있다.
남 「아시아」 문제에 관한 양국의 견해는 상당히 접근, 쌍방 각자의 입장표시 부분에서 『강대국간에 「라이벌」이 관계를 지양하고』 『자결권을 존중한다』는, 서로 상대의 용어를 차용하기까지 했다. 「코뮤니케」는 양국이 동북아문제에 관해선 남아나 동남아의 그것들과는 대조적으로 극히 미결상태에 있다는 인상을 남기고 있다. [존·핀처(미존즈·홉킨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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