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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서 '꽃보다 … ' 보는 북 주민들

중앙일보

입력

여성들이 좌판을 벌여놓고 줄지어 앉아 있는 북한의 한 장마당(시장).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까까머리 소년이 외투 안 가슴팍에서 종이 봉투에 싸인 납작한 물건을 꺼내 들고 호객 행위를 한다. 화면에는 등장하지 않는 앞쪽의 상대방에게 DVD 타이틀을 팔려고 시도하는 중이다. 소년은 5개를 사면 값을 깎아주겠다고 흥정을 벌인다. 소년이 들고 있는 물건에는 한국 등 북한 밖의 세상에서 온 TV 드라마나 영화가 담겨 있다고 설명하는 내레이션이 영상 위로 흐른다.

 이어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이 나란히 벽에 걸려 있는 북한의 가정집. 두 여성이 전등불이 꺼진 컴컴한 방에서 DVD 플레이어를 열어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다. 한 여성은 “남조선 사람들이 소련인지, 구라파인지 놀러간 것 같애”라고 말한다. 화면 속의 영상은 한국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 프랑스를 여행 중인 배우 신구와 백일섭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약 3개월 전 한국 TV에서 방송됐던 내용이다. 두 여성은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황급히 플레이어를 닫았다.

 이 영상들은 영국의 공영방송 ‘채널4’가 만든 다큐멘터리의 일부다. 이 방송사는 일본 언론사 아시아프레스의 북한취재팀장 이시마루 지로(石丸次郞)와 한국에 살고 있는 탈북자들의 도움을 얻어 북한 내부에서 촬영한 영상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북한에서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몰래 카메라로 이를 찍어 국경 밖으로 전달한 것이다. 다큐멘터리에는 북한의 중국 쪽 국경 지역에서 북한인을 접촉해 한국의 방송물이 담긴 DVD 타이틀이나 이동저장장치(USB)를 북한에 유포시키는 일을 해온 ‘미스터 정’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최근 북한에 밀반입시킨 외국 영화 중에서는 ‘스카이폴(007 시리즈)’이 가장 인기를 끈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감독 제임스 존스는 “북한 내부 촬영 영상을 구하는 데에 탈북자들이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비밀 국가 속의 삶(Life Inside the Secret State)’이라는 제목의 이 다큐멘터리는 영국에서 14일 밤(한국시간 15일 오전)에 방영된다.

 최근 북한에서는 한국 등 외부 세계의 방송물을 보다 발각돼 주민 수십 명이 처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45분 분량인 이 다큐멘터리에는 금지된 외부 세계의 방송물 시청뿐만 아니라 김정은 정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거나 군인들의 생활 간섭에 항의하는 주민들의 모습도 들어 있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북한의 부유층으로 추정되는 한 가정에서는 김정은 정권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중국에서는 (여기와 달리) 언론의 자유가 있잖아”라고 말하는 부분도 있다. 북한 여성이 트럭으로 무허가 버스 영업을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해 북한 군인이 문제를 삼자 그 여성이 군인을 향해 “상관을 불러오라”고 소리치며 거칠게 항의하는 모습도 있다. 평양의 한 백화점에서는 직원이 “여기 있는 물건들은 판매용이 아니라 전시용”이라고 말하는 것이 몰래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존스 감독은 “북한 정권의 통제 기능에 상당한 균열이 생겼음을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알 수 있었다. 북한 주민들은 한국이나 서방 세계의 방송물을 보며 체제에 대한 의심과 불만을 키워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본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북한 전문가인 존 스웬슨 라이트 교수는 “북한 주민의 상당수가 한국 방송물을 본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런 모습을 누군가가 영상으로 찍어 외부로 유출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놀랍다”고 말했다.

런던=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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