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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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 달에 보게 된 책들은 문예지로「시문학」「현대문학」「월간문학」, 종합지로「월간중앙」「지성」등이다.
월평을 쓰는 사람은 두 가지의 괴로움을 겪는다. 우선 남의 작품을 테스트하는 괴로움이다. 그 다음은 자기가 테스트한 그 행 오를 남에게 다시 테스트 당한다는 괴로움이다.
이러한 괴로움들을 무릅쓰고 도 왜 우리는 월평을 쓰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꼭 심리학적 무슨 해답이 필요할까? 필요한 사람도 혹 있을는지는 모르나 과거에도 월평을 썼고 지금 이렇게 또 쓰고 있는 나로서는 답이 별로 까다롭지가 않다. 월평이란 몇 장 안 되는 짧은 글이기는 하나 결국은 우리시단에 보내는 하나의 의견일 수밖에는 없다. 테스트하고 테스트 당한다는 그 이중의 괴로움보다도 무엇인가 우리시단에 의견을 보내고 싶다는 본능이 더 강하게 움틀 때 월평이라는 형식의 글을 쓰게도 된다. 이런 식의 참여도 나는 나대로 시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월평이란 이 땅에서는 가장 오해를 사는 글이다. 따라서 혹 종의 오해를 미리 풀어두기 위하여 몇 자 허 두를 더럽히게 되었다. 쑥스러운 일이다.
박목월씨의『빈 컵 외4편』(시문학) 을 읽자 씨가 언젠가 한 말이 생각났다. <시가 이제는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그 말이다.
시인에게 시가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생이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시인에게 있어 시는 곧 인생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매 이분이 어쩌자고 이런 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시인이 시에 대한 의식의 어떤 부담이 없이 다르게 말하여 시에 대안 의식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리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일일까? 그것은 아마추어들의 생각이 아닐까? 인생에 대한 달관을 글자 그대로 믿을 수 없듯이 시에 대한 달관도 글자 그대로는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시에 대한 의식의 질곡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시인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시인의 지옥이자 영광 (좀 과장해서) 이 아닐까?
목 월 씨가 시를 그다지 까다롭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그 자세는 이번의 5편 작품에도 잘 드러나 있는 것 갈다. 이미 노경으로 접어든 분을 붙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실례가 되겠지만 한마디 꼭 하고 싶은 것은 씨에게는 일찍 형이상학적 어떤 대결의식이 없었지 않았나 하는 그것이다.
현대·문명·존재·언어(그것이 실존적 문제성) 등등 현대시가 고민해 온 문제들로부터는 언제나 한 발짝 슬쩍 물러선 자리에서 시를 써온 분이다. 씨의 시에는 작법상의 모험도 없었고 정신상의 어떤 비극성도 없었다. 씨는 다만 인생을 두고 개인적 (사적)으로 서정적 음미를 하고 있었다. 서정시인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이다. 이번의 작품들에도「신앙」이니 「악마」니「기결수」니「묵시론」이니「벽」이니「상실」이니 하는 타입의 긴장을 자극하는 어휘들이 보이기는 하나 거의가 거의 목 월 자신의 사적인 용어로 감미롭게 처리되고 있다.
그러나 씨의 시를 읽는 것은 매양 즐겁다.
서정시는 언제나 인생을 감미롭게 해준다는 뜻으로도 그렇고 씨의 수사의 재능이 당대 일급이란 뜻에서도 그렇다.
이번 5편중에는「틈서리』가 정신의 어떤 드라마를 보이고 있다. 이 작품 속의「기결수」란 어휘도 다른 작품들에서 쓰이고 있은 아까 예시한 여타의 어휘들에 비하여 훨씬 긴장감을 주고 있다.
서정주씨의『속·질마재 신화』(현대문학) 는 누가 말하고 있듯이「샤머니즘」이니「신라정신」이니 하는 것들과는 직접의 관계는 없다.
이번의 『신부』『해일』2편은 애정에 대한 시인의 「비 정일 따름이다. 약간 고풍하고 청교도적이기는 하나, 따라서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애정 시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입체감이 없어 싱겁기는 하겠으나 아름다운 것은 도리 없이 아름다울 뿐이다. 그리고 씨의 서술방법에 더욱 시가 있다.
서술방법의 차이는 감도의 밀도 차라고 할 수 있다. 범속한 시인은 이렇게 쓰지 못한다. 따라서 목적도 소재도 놓치고 만다.
김영태씨의『목탄서 몇 점』(현대문학)은 매우 난해한 시다. 그리고 이분의 독특한 미의식과 생의「비전」이 바탕에 깔린 아주 개성적인 난해 시다. 요즘의 난해 시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의 유형성과 문체 및 유추방식의 유형성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이 작품들에는 소재가 거의 없는 듯이 보인다. 무엇을 보아도 거기 촉발되는 미의식과 생의 어떤「비전」-그것은 어떤 일정한 체계를 이루지도 못할 뿐 아니라 조형조차도 못 이룬다. 조형 이전의 어떤 혼돈-그것은 언어의 입장에서는 의미 이전의 혼돈이다.
무의미의 시는 이리하여 잘하면 언제나 하나의 계시가 될 수 있다.
신동집씨의『끝나는 계절 외4편』(현대문학) 온 근년 내의 이분의 관심사를 다시 한번 드러내 보이고 있은 그런 작품들이다. 약간의 감상과 통속을 곁들인 채로 현학적으로 말하여 「존재하는 것의 고적 감」- 이런 것이「본」으로 깔려 있다.
이번의 5편의 작품이 가진 양감은 이 톤에 있다. 그것을 빼면 단순한 서경시일 따름이다. 목 월 씨의 시에 비하면 수사에 있어 매우 달리고 있으나 시에 목 월 씨의 경우보다는 훨씬 양감을 주고 있는 것은 이 톤이 되고 있는「존재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형기씨의『해바라기』(월간문학) 는 오랜만에 대하는 이분의 작품이다. 유추가 상투적인 평범하기는 하나 짧게 끊은 항들이 매우 상쾌하다. 힘차게 뭔가를 긍정하고 있은 듯한 발상에 어울리고 있다. 명과 암의 역학관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드러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고 코멘트도 조금은 더 축였어야하지 않았을까?
이가림씨의『반 술의 눈물 외2편」중 첫 째 번 것은 이른바 저항 시, 참여시의 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흑인가요를 닮고 있으나 훨씬 날카로운 데가 있다. 이런 시를 대하면 시가 정치나 현실의 부조리와 어떻게 대결해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케 한다. 정치나 현실에 대한 비판능력도 능력이지만 시를 만드는 방법 말이다.
송욱씨의『까치 외1편』(지성)은 모두 소품이다. 2편이 다「립스」의 미학을 아주 조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감정이입의 미학은 일종의「다이내미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소품들은 정물처럼 싸늘하다.
박재삼씨의「산에서 외1편」과「월간중앙」의 또다른 한편, 도합 3편중『아기발바닥…』 이 이분의 약점일수 있던 감상이 구제되고 있으나 끝머리 한 행은 사족이자 군더더기다.
박남수씨의「이월」(월간중앙) 은 이분의 조형능력을 재확인케 하는 작이기는 하나 이 역시 끝머리 한 행은 지나친 상투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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