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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휴전회담의 개막<전반부>(6)|한국의 입장(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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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정부와 한국사람들은 중공이 개입하고 이어 「맥아더」원수가 아시아 무대에서 사라지자 전쟁의 전망을 스스로 점칠 수 있었다. 그것은 비관과 좌절감이 교차된 어두운 점괘였다.
한때는 「워싱턴」과 「유엔」에 감돌았던 한국 철수론으로 절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1951년 봄에 「유엔」군이 다시 38선을 넘자 어느 정도 희망을 되찾기는 했다. 그러나 직접 당사자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이 문제에 민감한 한국사람들은 미국이나 「유엔」이 한국전쟁을 싸움터에서 판가름 할 의욕이 없다는 것을 익히 내다볼 수 있었다.
벌써 1950년 겨울부터 뉴요크와「워싱턴」상공에는 평화협상 탐색 기구가 심상치 않게 떠오르곤 했다. 중공이나 북괴도 그들의 춘계공세 실패 후부터는 한반도를 무력으로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되었다. 전쟁을 계속하다가는 오히려 군사적으로 더 결정타를 입게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렇게 미국과 공산측은 제각기 사정이 일치되어 협상을 통한 한국전해결이란 공통분모를 찾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한국입장은 몹시 외롭고 난처하게되었다. 이런 사태발전을 짐작은 했지만 한국으로서는 전란의 상처를 입은 채 그리고 국토가 양단된 채 휴전을 바랄 수는 없었다.

<휴전은 분단 뜻하는 것>
미국과 유엔이 평화적 수단으로 한국통일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몇 백년이 계속될지 모를 국토의 분단을 뜻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전력을 다해 싸웠고 국토는 초토화됐고, 20명 중 한명 꼴은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수많은 고아와 집 잃은 사람들이 폐허를 헤매게 되었다. 전화는 한반도를 네번이나 오르내리면서 비 쓸 듯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이런 엄청난 희생을 당하고도 전보다 못한 장래에서 아무 소득 없이 전쟁을 끝낸다는 것은 이승만대통령이나 한국인 전체가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한국은 전쟁터에서 공산군뿐만 아니라 휴전회담과도 싸우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때까지는 혈맹이던 미국과 유엔과의 관계가 긴장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이승만대통령과 한국민이 전개한 줄기찬 투쟁과 이와 함께 겪은 온갖 시련은 가히 한국근대사의 압권이라 할 만 했다. 6월23일의 소련외상 「야콥·말리크」제의가 나온 지 2일 만인 6월26일(한국시간) 하오 4시에 동경으로부터 비래한 「유엔」군 총사령관 「지리웨이」대장은, 「밴플리트」미 8군 사령관, 「콜터」8군부사령관, 「무초」대사와 함께 이승만대통령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리지웨이 대장은 「워싱턴」의 지시에 따라 「유엔」군 측이 「말리크」제의를 받아들여 휴전협상에 응하겠다고 통고했다.
동석한 측근자 한사람 말에 의하면 이대통령은 덤덤한 표정으로 「리지웨이」장군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바로 이튿날 첫 포문을 열었다.
휴전협상에 대한 한국정부입장을 밝히는 첫 공식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2년17일 동안 계속된 휴전회담 중, 수없이 발표된 대통령성명 중의 효시인 이 성명은 미국과 「유엔」의 대한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일견 무모할 만큼 강경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런 일련의 성명들은 웅대한 포석과 치밀한 계산아래 발표된 것이며 결코 공포는 아니었다.
또한 「워싱턴」도 이대통령이 휴전회담을 겨냥해서 쏘아대는 포화가 공산군것보다 몇 갑절 더 위력이 있고 두통거리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뼈저리게 느끼게된다.
다음은 6월27일의 대통령성명요지.

<인위적 경계로 한국을 분할하는 것을 수반하는 소위 평화안은 남북을 물론하고 전 한국민이 절대 수락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어느 부분이든지 침략자의 수중에 남겨두는 제안은 이 나라에 대한 모욕이다. 소련지도자들이 현재 추구하고 있는 평화는 그들의 패전을 자인한 것이며 그들은 무력으로 달성하지 못한 것을 외교적 음모로 성취코자한다.

<“소련 흉계에 빠지지 말라”>
소련지도자들의 언행일치를 믿을 만큼 천진난만한 자가 세상에 어디 있으랴. 유엔의 평화안과 소련의 평화안은 각각 별개의 것이다.
만약 유엔이 소련 측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유엔」자신의 손으로「유엔」을 패퇴시키려는 소련지도자들의 흉계에 빠지는 것이 될 것이다. 「유엔」이 이 함정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게된다면 전 세계 인민의 눈에 국제적 정의의 법정으로서의 유엔자격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도대체 소련은 언제부터 그렇게 세계평화를 갈망하여 온 것인가. 그들이 남한을 그들의 판도 속에 집어넣으려고 남침을 개시했을 때 그들은 평화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인가.
우리 국민을 학살하고 우리국토를 파괴하는 것이 세계평화를 보장하려는 노력이었던가. 소련을 포함한 몇몇 국가는 오늘날까지 38선으로 한국을 분할하고 이번 전쟁을 일으켰으며 장차도 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될 상태를 존치 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것이 평화제안이란 것인가. 중공군은 분쇄돼가고 대량으로 살육되어 압도적 패퇴에 변하고 있다. 이렇게 분쇄된 중공군을 다시 내려오도록 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침략자들에게 상을 주려는 것인가, 벌을 주려는 것인가. 이러한 제안은 평화안이 아닌 만큼 우리는 그것을 평화안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인정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대통령을 얕봤던 미국>
공산군이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로 철퇴할 것에 동의하도록 만듦으로써만 비로소 유엔이 선언한 제 목적에 합치되는 평화교섭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해결 지으려면 한국민에 대한 공산침략이 장차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실한 보장을 주어야한다. 또 우리 국토를 과거 5년 동안 분할하여 온 인위적 경계선을 또 다시 건설하려는 여하한 제안도 결국 우리 한국민은 깊은 실망을 가지고 보게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민은 그들이 민주주의적으로 또 합법적으로 선출한 대표, 즉 한국정부를 통하여 평화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협의를 받고 정보를 받을 수 있게 되어야한다.
말리크의 제안은 이러한 조건에 응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평화에 대해 어느 정도의 희망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조속한 평화라는 허황한 약속에 속아 가지고 결국 더 크고 더욱 무서운 전재의 서곡이 되어버린 어느 평화안도 수락하지 않음을 전 세계에 제고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대통령의 위와 같은 제일성에는 별로 개의치 않은 듯 기정방침대로 착착 휴전회담 개최준비를 서둘렀다. 이때만 해도 한국군의 작전권을 쥔 「워싱턴」은 이대통령의 존재가 한국휴전성취에 큰 방해로는 생각지 않고 얕잡아보았는데 이것은 나중에 큰 오산임이 드러났다.

<제2탄은 1탄보다 강경>
이대통령은 「리지웨이」장군이 공산군사령관에게 「덴마크」병원선에서 휴전회담을 열자고 제의한 다음달인 6월30일에 변영태 외무장관으로 하여금 제2탄을 발사케 했다. 그것은 6월27일의 제1탄보다 훨씬 더 강경하고 사실상 북한에서의 공산군일소를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내용이었다. <전쟁에 관한 대한민국의 태도를 명확히 해둘 시기가 온 줄 생각한다. 우리는 정전을 구태여 반대하지 않는다. 정전의 조건을 명시하여 공산주의자의 모략과 술책에 빠질 위험성을 제하려한다.
우리는 다음 5개 조건을 기초로 한다면 휴전교섭에 응할 용의가 있다.

<정부성명 국회서도 지지>
⑴중공은 한국으로부터 국경선을 넘어 만주로 철퇴하고 북한비전투원의 생명과 재산에 손해를 가해서는 아니 된다.
⑵북괴군은 무장을 해제해야한다.
⑶「유엔」은 제3국이 북한공산당에 군사적이나 재정적이나 기타의 형식으로 원조치 못하도록 동의해야한다.
⑷한국의 정 대표가 한국문제의 전부 혹은 일부를 토의하거나 고려하는 어떠한 국제적 회의 혹은 회합에도 참가해야한다.
⑸한국의 주권이나 영토를 침해하는 어떠한 안이나 행동은 적법적 효력이 있는 줄로 인정치 않을 것이다.>
휴전협상에 대한 한국정부의 이 같은 5개 조건은 즉시 미·영을 비롯한 16개 한국참전국 정부와 「유엔」사무총장에 전달되었다. 미국에는 양유찬 대사가 그리고 영국에는 이묘훈 대사가 각각 이 정부각서를 전달했는데 두 나라 태도는 모두 냉랭했다는 것이다.
한편 국회에서도 이 문제만은 여·야를 초월해서 정부태도를 지지했다. 대통령의 첫 성명이 나오던 6월27일에 국회는 양우정 의원으로부터 「말리크」제의에 관한 경위보고를 듣고, 곽태진 의원 외 11명이 정전반대 호소를 유엔과 참전 16개국에 보내자는 긴급동의 안을 제의했는데 이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다시 7월2일에는 38선 정전에 항의하기 위해 유엔에 대표단을 파견하라는 대 정부건의안을 채택하고 이날부터 휴전문제에 관해 외무장관보고를 매일 듣기로 가결하였다.

<불붙은 휴전반대 데모>
이런 정부와 국회의 휴전반대에 일반 국민도 재빨리 호응하였다. 이미 7월1일에는 부산에서 「38선 정전반대·국토통일국민총궐기대회」가 열려 「데모」대열이 광복동거리를 누볐고, 곧이어 이 휴전반대의 물결은 서울·광주·대전·대구 등의 대도시를 비롯하여 전국각지로 파급했다.
이런 데모나 집회는 정부가 부분적으로는 조직 동원한 것이지만 휴전반대의 함성은 온 겨레의 자발적인 참된 외침에 틀림없었다.
◇주요일지(1951년7월16·17·18일)
※7월16일 ▲미 공군, 최대의 야간폭격 ▲이대통령, 서울서 「무초」대사와 회담 ▲평양방송, 외국군의 한국철수요구 ▲장 총통, 국부의 대일 강화조약 조인국서 제외비난 ▲ 「이란」, 계엄령 선포코, 공산주의자들 대거검거
※7월17일 ▲경찰, 덕유산서 공비소탕 ▲국내 각지서 휴전반대궐기대회 ▲미국「미조리」주에 대홍수, 피해 7억5천만 불
※7월18일 ▲휴전회담 제6차 회의 ▲계엄사 서울분실 설치 ▲양유찬 대사, 대일 강화조약 조인에 한국참가를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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