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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부활한 반상의 제왕, 10번기가 기다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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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세돌(左), 구리(右)

이세돌 9단이 다시 살아나는 바람에 난파선 분위기를 짙게 풍기던 바둑 동네가 원기를 되찾았다. 9월 이후 22승2패. 승률이 90%를 넘는다. 이 기간에 그는 명인전 결승과 국수전 도전자 결정전에 올랐고 바둑리그 소속팀인 신안천일염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 무엇보다 삼성화재배 결승에 올라간 것이 분위기 반전에 결정타가 됐다. 때마침 이세돌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중국의 구리 9단도 몽백합배 세계대회 결승에 올라 17세 소년 기사 미위팅 4단과의 대결을 앞두고 있다. 이 바람에 우승상금 10억원이 걸린 이세돌 대 구리의 ‘10번기’가 세기의 대결다운 면모를 갖추게 됐다. 배태일 박사가 발표한 11월 세계랭킹에서도 이세돌과 구리는 1위 스웨 9단의 뒤를 이어 나란히 2, 3위에 올라 있다.

 사실 여름까지만 해도 이세돌과 구리는 힘이 다한 듯 보였다. 지난 7월 이세돌은 한국랭킹 3위로 밀렸고 구리는 중국랭킹 7위까지 밀려났다. 이 기간에 판팅위(17)·스웨(22)·저우루이양(22)이 세계대회에서 잇따라 우승했다. 1990년 이후 출생한 중국의 어린 기사들이 세계바둑을 휩쓸고 있었다. 이세돌과 구리는 바둑의 전설이자 넘볼 수 없는 1인자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1인 독주 시대는 끝나고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다. 당황스러웠다. 이세돌과 구리는 쉽게 구경하기 힘든 천재기사인데 나이 30에 벌써 밀린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팬들은 끝없이 물었다.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라는데 어떻게 인생 경험이 없는 어린 기사들이 세계 최고봉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 질문에 이창호 9단의 예를 들었다. 이창호 9단은 천재 중의 천재였고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1인자였으나 2005년 세계대회에서 마지막으로 우승한 이후 다시 우승하지 못했다. 2005년은 1975년생인 이창호가 만 30세 되던 해였다. 이 9단은 그 후 준우승만 열번 했다.(하지만 이 바람에 만 49세에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한 조훈현 9단과 41세에 응씨배를 제패한 서봉수 9단이 새롭게 조명되기도 했다.)

 다행히 이세돌과 구리는 약속이나 한 듯 되살아났다. 팬들은 환호했다.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이세돌은 탕웨이싱(20)과, 몽백합배 결승에서 구리는 미위팅(17)과 각각 대결한다.(삼성화재배 결승은 12월 4일, 몽백합배 결승은 이달 30일 열린다.)

 흘러간 전설과 떠오른 ‘90후’들의 정면 대결이다. 나는 이 대결에서 이세돌과 구리가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그리하여 조만간 시작될 이세돌-구리의 10번기가 진정한 ‘세기의 대결’이 되기를 희망한다. 벌떼 같은 저 무수한 신예 강자들을 생각할 때 30세가 된 이세돌과 구리가 정상에서 오래 버틴다는 것은 기적과 같다. 그래서 이번 10번기가 더욱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라이벌이자 최후의 1인자라 할 이세돌과 구리가 승부세계의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했으면 좋겠다. 두 기사는 오는 24일 베이징에서 ‘10번기’를 시작한다는 기자회견을 한다.

10번기=단 둘이 10판을 연속 두어 승부를 가리는 대국 방식으로 ‘치수 고치기’에 많이 쓰였다. ‘우칭위안(吳淸源) 10번기’가 유명하다. 우칭위안은 일본의 일류기사들과 10번기를 벌여 거의 모든 기사의 치수를 고쳤고 자존심이 상한 기사는 은퇴를 하기도 했다. 이세돌-구리 10번기는 치수 고치기는 아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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